이성재 목사
(전,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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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에서 ‘겸허한 자신감’, 다시 말해서 겸손하고 온유하지만, 당당한 심지를 가지고 매사에 임하는 분들을 보면 고개가 숙여진다. 작은 배가 지혜의 강물을 따라 흘러가듯이 노년의 삶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며 통찰력 있고 개혁적이며 균형 잡힌 사고로 자신을 끊임없이 다듬으며 살아가는 동년배를 만나거나, 통화를 하고 있노라면 내 자신의 인생이 그렇게 흐뭇하고 감사치 않을 수가 없다. 그들에게는 향수처럼 진하지는 않지만 은은한 향기가 있고, 그들의 한 마디 한 마디 말 속에는 오랜 시간 남는, 노년에게서만 느껴지는 강한 힘이 있다. 나는 그 강한 힘을 나이 듦의 품격이라고 생각한다. 이유는 그들에게서는 평생 겹겹이 쌓인 영성 깊은 권위의 무게를 감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노인의학의 권위자인 루이스 해린슨은 그의 저서 《나이 듦에 관하여》에서 “사람의 몸은 단순히 나이 듦에 따라 세포와 장기 기능이 쇠퇴해 가는 몸뚱이에 불과한 것만은 아니다. 일생 동안 문학적 의미로 됨됨이 깎여지고 갈아지며, 또 끊임없이 다듬어지고 닦아진 나이테의 결과물이다”라고 했다.
창세기 47장 7절에서 10절을 보면 겸허한 자신감을 가지고 은은한 노년의 향기를 풍기는 한 사람을 만나게 된다. 바로 요셉의 아버지 야곱이다. 그리고 전적인 하나님의 돌보심과 지혜로 타국인 이집트의 총리가 되었으며, 또 뛰어난 국정 수행 능력을 인정 받아 아버지 야곱을 이집트 왕 파라오 앞에 서게 한 아들 요셉을 만난다. 사실 야곱은 극심한 가뭄과 굶주림으로 생존의 한계 상황에 처했던 가나안에서 아들들의 긴급한 간청에 의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가나안을 떠나 이집트, 그것도 권부(權府)의 중심인 왕궁에 초대되어 갔다. 그러나 야곱은 전혀 주눅이 들지 않고 온유하면서도 영성 깊은 권위로 파라오를 축복한다(47:7). 아무리 아들이 이집트의 제2인자라지만 외국인이며, 당시 세계 최강국의 절대 권력자를 자기 아버지로 하여금 알현케 하는 것도 가당치 않은데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왕을 축복하는 그 야곱을 상상해 보라. 더군다나 야곱과 그의 가족들은 생존 때문에 요셉의 가 없는 사랑으로 이집트에 와서 왕궁에 초대되었다고는 하지만, 외국인 난민의 신분이요, 더욱이 야곱은 다리를 저는 장애인인데다가, 오랫동안 굶주리고 핍절한 생활에 찌든 극노인으로서 남루하기 짝이 없는 몰골이었기에 더욱 그랬을 것이다. 구약 시대 족장들의 축복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신적 공수동맹비준(창 12:3)에 근거한 특권이었다. 또한 왕정 시대에는 군왕(君王)이 백성을 축복하는 것이 상례였음에도 야곱은 족장의 자격으로 당당하게 왕을 축복한 것이다. 역설(Paradox)이다. ‘파라오’(Pharaoh)란 보통명사로 고대 이집트의 최고 통치자이자, 살아 있는 ‘태양신’으로 추앙 받는 존재를 말한다. 그런 절대 권력자요 태양신에게 아무리 2인자 총리의 부친이라 하지만 왕을 알현(謁見)하는 자리에서 선제적으로 축복하는 야곱의 권위는 도대체 어디에 근거한 것이었을까? 상식적으로 도저히 이해하기 불가능한 상황에 오히려 세계 패권국의 그 태양신은 야곱에게 정중히 ‘나이’를 묻는다. 당시 노인에게 나이를 묻는다는 것은 그 장수함에 걸맞은 만수무강을 비는 하나의 예법이었다(왕상 1:3,참조). 야곱은 자신의 장수함을 자랑하지 않고 “나그네의 길의 세월”, “험악한 세월”(‘나그네’는 (히) 마구르(Maguru)로 임시 거처, 거류지를 의미)을 130년 살아오고 있다고 겸손히 고백한다(47:9). 하얀 백발에 섬광(閃光)과도 같은 솔개의 눈빛을 반짝이며 파란만장했던 인생을 ‘나그네 길’, ‘험악한 세월’로 축약하여 쏟아내는 노인에게서 왕은 강렬한 내공에 압도되었기에 만수무강을 비는 심정으로 나이를 물었으리라.
이삭이 40세에 이종 형 부드엘의 딸 리브가와 결혼하여 20년 만에 얻은 일란성 쌍둥이 형제가 바로 에서와 야곱이다(25:25-26). 성경 창세기는 이들이 잉태될 때부터 서로 싸웠으며 산모 리브가는 견딜 수 없는 복통을 주님께 호소하자 되돌아오는 답인즉 “장차 이 가문이 두 국민으로 나누어지며, 형이 동생을 섬길 것”이라는 충격적인 예언(25:22-23)이랄지, 그들이 출산 할 때 동생이 ‘형의 발꿈치를 잡고 태어났다’ 하여 동생의 이름을 그 실상대로 ‘야곱’이라 지었고, 형은 ‘털이 많다’고 하여 ‘에서’라 지은 것(25:24-26) 모두가 그들의 장래에 되어질 일을 짐작케 한다. 야곱은 어릴 적부터 두뇌회전이 빠르고 임기응변에 능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뛰어난 순발력은 은사로 받았으나 수단을 목적화하는 뒤틀린 생존전략형 이기주의자로 전락하고 만다. 게다가 어머니 리브가는 하나님의 예언을 믿었기에 야곱을 지극히 사랑했지만 방법이 잘못되어 결국 그것이 야곱의 ‘험악한 세월’을 겪게 하는 결정적 동기가 되었고, 그의 인생의 한복판을 가로지른 행위는 거짓말, 속임수(사기), 분노, 비방, 억울함, 도주, 위기, 화해 등으로 점철되었으며, 그의 범죄가 자식들에게도 대물림되어 귀향 중 세겜에서의 외동딸 디나의 피해와 그곳 청년들을 속이고 보복 살해한 사건, 그리고 오래 전, 야곱이 노년에 총애하던 라헬 사이에서 얻은 열한 번째 아들 요셉이 이복 형들의 미움을 받아 이스마엘 상인에게 인신매매한 사건 등 너무도 처절한 인간 흑역사를 모조리 행하고 겪었던 야곱의 130년 인생은 암흑했다. 한 순간도 눈을 떼지 않으시고 응시(凝視)하시는 하나님(EL-Loah)은 인간의 끝없는 배반과 교만함에도 불구하고 “속여서 빼앗는 자” 야곱에게 부메랑이 되게 한 밧단아람의 외삼촌 라반으로부터의 20년 무임금 노동 착취가 결국 얍복 강에서 ‘하나님과 씨름에서 이긴 승리자 ‘이스라엘’로 개명(改名, 31:28) 하심으로써 그의 인간적 실패가 영적 승리로 전환(Tuning Point)시키신 구원 선언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얍복 강 구원 선언’은 야곱의 전인격을 여호와 신앙으로 치환(置換)하신 사건이며, 지난 날 도망하던 중 천사를 통하여 맺은 ‘벧엘 언약(28:10-22)’에 근거하여 야곱이 아브라함의 실질적 언약의 후계자로 하나님으로부터 정식 비준한 사건임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파란만장한 야곱의 생애는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폐기 처분해야 할 인간 쓰레기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장인(匠人)의 솜씨로 깨고, 깎고, 갈고, 다듬고, 닦아서 명품 이스라엘로 새롭게 탄생시키셔서 이집트 왕 파라오를 당당하게 축복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그가 과거에는 타인의 복을 ‘빼앗는 자’로서 형의 복수를 피하여 천리 길 외가로 도망친 것은 부모의 권유였다. 그러나 실은 하나님께서 야곱 보다 사기성이 월등히 탁월한 라반의 특수훈련소에 입소시켜 하나님이 의도하신 새사람으로 조련하심에 있다. 그 결과 이제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나서 타인을 축복하는 나이 듦의 품격과 권위를 갖춘 그 이름 이스라엘다운 인생을 보여 주고 있다. 축복하는 야곱이야말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나의 생애에 큰 울림을 준다. 죽음을 앞둔 야곱이 하나님의 약속을 이을 계승받은 공인(公人) 자격으로 영적 장자인 요셉에게 충실히 가나안 언약을 전수함과 동시에 두 아들로 대표된 두 몫의 기업을 요셉에게 계승하여 훗날 가나안 정복에 따른 12지파로 신정 국가 이스라엘을 창건케 하셨던 하나님의 경륜에 감탄할 수 밖에.
싱그러운 푸른 계절이다.
나 또한 이와 같은 이스라엘(그리스도인)다운 모습으로 자녀들과 다음 세대들이 기억할 수 있는 존재로, 또 진정한 복된 길은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십자가의 고통과 사랑으로 연금(鍊金)된 그 길이라는 유산을 자녀들에게 삶으로 보여주는 책임 있는 존재로 생을 마치고 싶다.
“그는 늙어도 여전히 결실하여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니 여호와의 정직하심과 나의 바위 되심과 그에게는 불의가 없음이 선포되리로다” (시편 92:1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