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 부흥에 원동력이 되었던 빌리 그래함 목사]
극동방송(이사장 김장환 목사)은 빌리 그래함 전도대회 50주년 기념 희년집회를 내년 6월 3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진행한다고 밝혔습니다. 1973년 ‘오직 예수’로 한국 교회 부흥의 원동역이 되어 부흥의 불을 일의 켰던 빌리 그래함 전도대회가 다시 재현될 전망입니다. 한국 교회의 큰 부흥의 불길이 일어났던 그때의 복음에 대한 열정이 대한민국에 다시 일어나기를 소망하며 희년집회를 기획하고 있습니다. 1973년 당시의 부흥집회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 준비된 행사이기에 그 준비 과정에도 상당한 기도와 성도들의 적극적인 동참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무엇보다 당시 집회를 통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거나 은혜 받았던 모든 성도들을 모을 예정입니다. 극동방송은 이를 위해 3개의 권역별로 준비대회를 가지려고 계획하고 있습니다. 호남권인 광주극동방송, 목포극동방송, 전남 동부 극동방송, 전북극동방송을 통해 모아진 성도들을 위해서 6월 9일 목요일 오후 6시 30분에 광주은광교회에서 1973년 참석자 모임을 가진 뒤 이어 오후 7시 30분에는 준비대회를 가질 예정입니다.
1918년 11월 7일 노스캐롤라이나주 샬럿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래함 목사는 대중들에게 호소력 있는 메시지를 전한 설교가로 유명하였습니다. 텔레비전과 라디오 등을 통해 그동안 2억명이 넘는 사람에게 설교를 전했습니다. 그래함 목사는 특히 지난 1973년 한국 여의도 광장에서 4일 동안 110만 명 앞에서 설교하며 한국 기독교 부흥과 성장에 큰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 받고 있습니다. 그는 1949년 LA 부흥집회를 계기로 큰 성공을 거둔 후, 1950년 빌리그래함 복음전도협회를 창설하여 전 세계를 누비며 복음 전도에 나서 ‘세계적인 부흥사’가 됐습니다. 그는 전 세계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설교하고 전도한 목회자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1993년 한 해 동안에만 250만명 이상이 그의 설교를 듣고 회심했다고 전합니다. 총 185개국 2억 여 명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특히 TV와 위성방송, 비디오와 영화, 인터넷 등 발전하는 매체들을 적극 활용했습니다.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비롯해 조지 W. 부시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많은 미국 정치인들에게도 영감을 주며 ‘미국의 목사’로 불렸습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는 미국인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였으며,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을 시작으로, 역대 대통령 12명의 영적 멘토 역할을 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는 한국과도 깊은 인연을 맺고 있습니다. 일본으로부터 해방을 맞은 한국은 미국의 하지 준장이 이끌었던 군정 상태였습니다. 당시 김일성의 지령을 받은 박헌영은 매일 서울 시청 광장에서 미군 철수를 주장하는 대중 집회를 하였습니다. 軍政(군정)은 비밀리에 여론 조사를 하였는데, 결과는 공산주의 50%, 자유민주주의 30%, 사회주의 20%를 찬성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결과를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고되었고, 1년 후 미군이 철수하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3년 후, 1950년 6월 25일 북한은 일요일 새벽 남침을 감행했습니다. 美 대통령 트루먼은 토요일 별장에서 밤 침실에서 비서로부터 북한이 남침했다는 보고를 받고 예상된 일이라고 하면서 방치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알게 된 빌리 그래함 목사는 대통령을 방문하여 미군을 파병하여 한국을 求(구)할 것을 제안하였습니다. 그러나 트루먼 대통령은 “한국 국민들이 원하는 대로 됐다” 면서 거절하였습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는 라디오 방송으로 전국에 “트루먼대통령이 한국을 버리고 있다”고 비난하였습니다. 방송을 들은 미국국민들은 대통령을 향하여 비난하였습니다. 한편, 빌리 그래함 목사의 부인은 선교사였던 아버지를 따라 평양에 머물면서 학교를 다녔던 인연과 한국에 대한 애착으로 “대한민국을 북한의 남침으로 부터 구해야 한다” 면서 교회와 학교에서 여성들에게 호소하였습니다. 트루먼 대통령을 향한 여론은 악화 되었고, 결국 미국 대통령은 UN을 소집하여 만장일치로 대한민국을 지원하기로 결정 하였습니다. 북한의 침략으로부터 남한을 구한 후, 미국의 구호물자 지원이 이어졌습니다. 한국은 지원으로 연명하던 세계 최고 빈곤국에서 지금은 세계 경제 10위에 이르는 경제 대국이 되었습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는 1973년 여의도 집회에 당시 110만 명의 인파가 모인 것을 보고, “세계 각지를 다니며 전도대회를 해왔지만, 일생에 이렇게 많이 모여 열성적으로 경청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면서 “한국은 하나님의 은총이 있을 것이다”고 축복하기도 하였습니다. 한국전쟁과 전후 빈곤에 시달리던 한국에 각별한 애정과 필요 적절한 도움을 주신 빌리 그래함 목사님께 소천을 하셨지만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대한민국을 공산주의로부터 건져주시는 데 도구로 쓰임 받음에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가 한국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미국 선교사들에 의하여 복음이 전해져 당시 한국에는 기독교인이 50만 명이 있었고, 빌리 그래함 목사의 아내 루스는 아버지의 선교지인 평양에서 출생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가하면 빌리 그래함 목사는 공산권에서도 복음을 널리 전했는데, 1967년 유고슬라비아, 1977년 헝가리, 1978년 폴란드, 1982년 소련과 동독과 체코, 다시 1984년 소련, 1985년 루마니아, 1988년 중국에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의 설교는 간결하면서도 분명하게 죄, 십자가, 천국과 지옥, 부활과 예수의 재림에 대하여 전한 것으로, 미국과 전 세계에서 기독교가 크게 부상하는데 중대한 역할을 감당한 것으로 평가됩니다. 지구촌에서 이와 같은 복음 전도자를 다시 얻기는 쉽지 않을 정도로 그는 기독교 역사상 위대한 복음 전도자로 기록될 것입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의 우리나라사랑은 각별했습니다. 그는 한국전쟁 중이던 1952년 한국을 방문해 미군들을 위로하고, 서울과 부산 등지에서 각종 집회를 통해 한경직 목사를 비롯한 한국교회 지도자들을 만났습니다. 성탄절에는 경무대(警珷臺)에서 이승만 대통령과 만나 대담을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전도 집회의 음반을 1953년 발매하였습니다. 그의 설교 타이틀은 “자유가 울리게 하라”였습니다. 또 음반에는 이승만 대통령과의 대담을 함께 수록해 전쟁 중이던 한국에 대한 자유와 평화를 위한 지원과 반공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하기도 하였습니다. 전쟁이 끝난 1956년 그는 한국을 다시 방문, 한경직 목사와 함께 복음을 전파하며 한국교회의 부흥과 재건에 기여했습니다. 한국교회는 그래함 목사에게 많은 빚을 졌습니다. 그것은 경제적 지원뿐 아니라 영적 지원이었습니다. 한국교회의 급성장에는 1907년 평양 대부흥 이후 1970년대 수많은 부흥성회와 대부흥운동이 있었습니다. 1973년 빌리 그래함 전도 집회, 엑스플로74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1950년대 이후 1973년 다시 한국을 방문한 그래함 목사는 집회를 시작하며 “한국은 나의 제2의 고향”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 그를 통하여 한국과 한국민을 사랑하는 그의 심정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1973년 여의도 5.16 광장 및 전국을 투어하며 열린 그래함 목사의 설교는 복음을 알기 쉽게 전해줬습니다. 집회는 연인원 50만명이 목표였으나 무려 100만명이 참여하면서, 한국교회가 하나 되면 하나님이 역사하신다는 가능성과 함께 한국 교회의 폭발적 성장을 가져오는 전기를 마련했습니다. 1973년 한국전도 대회는 한경직 목사가 준비 위원회, 위원장이 되어 빌리 그래함 목사를 초청하여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5일에 걸친 전도 집회를 김장환 목사의 통역으로 개최했습니다. 마지막 날 집회에선 110만 명의 성도들이 모여서 한국교회가 폭발적 성장을 가져오는 전기를 마련했습니다.
1973년 가을에 우리 목포에 오셔서 목포정명학교 운동장에서 박종순 목사 (당시 목포양동제일교회)목사 사회, 김장환 목사님 통역으로 손짓발짓 그래함 목사님 하는 대로 알기 쉽게 하는 통역으로 감명을 받았고, 지금은 찬송가에 수록이 되어 있지만 조영남의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특송으로 당시 우리는 불러 보지 못한 복음성가로 처음 듣고 은혜를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이는 한국 개신교계의 역사적 명장면으로도 꼽힙니다. 그래함 목사님 자신도 “2천년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크고 역사적인 전도의 날이며, 한국 어느 곳에서나 영적인 감동을 일으키고 있다”고 감격을 쏟아낸 바 있습니다. 이를 계기로 한국교회는 ‘5천만 민족 복음화’라는 비전과 목표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는 북한 동포 해방을 위한 메시지를 통해 북한교회의 재건을 위해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1973년 ‘빌리그래함 전도 집회’, 1974년 ‘엑스플로 74’ 집회로 전도와 철야기도, 산 기도의 열정이 일어나면서 한국교회는 폭발적인 부흥을 경험했습니다. 엑스플로 74 전도 집회에는 334만 명 이상의 인파가 운집했고, 100만명의 결신자를 내었습니다. 권위주의 통치 시절 국민들의 영적 통로 역할을 했던 이런 영적 전도 집회가 종교적 차원뿐 아니라 정치·경제·사회적 차원에서도 선하고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는 그 후에도 1980년 ‘나는 찾았네’, ‘세계복음화 대 성회’ 등의 설교자로 꾸준히 방한해 한국교회 부흥의 불을 지폈습니다. 그런가 하면 1990년대에는 두 차례 북한을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1994년에는 북한을 방문해 당시 김일성 주석과 면담을 갖고 성경과 함께 복음을 전하였으며, 한반도 평화를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아들 프랭클린 그래함 목사 역시 북한을 수차례 방문하며 구호활동을 펼치고 역시 평양 봉수교회에서 설교하였습니다. 별세하기 얼마 전까지도 그래함 목사는 “내 남은 생애 가운데 한국의 남북이 통일된 모습을 보고 싶다”며 “통일은 하나님이 이루어 주시는 것이다. 주님께 구하라.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기도를 드리면 통일은 꼭 이루어진다”고 당부했습니다. 그래함 목사는 60여 년간 목회자로 활동하면서, 설교자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뜻에 따라 전 세계에 복음을 전파하는 데 힘썼습니다. 2억여 명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영적 지도자로서 해리 트루먼 전 대통령 이후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까지 모든 미국 대통령의 영적 멘토로도 활동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5월 18일, 극동방송 전국의 직원 200여명이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애쉬빌에 빌리 그래함 목사님 수양관 (코브)가 있는데 10일간의 일정으로 다녀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