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재 목사
(전,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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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대한민국은 지난 3월 9일(수) 윤석열 후보를 제20대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특이한 것은 역대 선거 중 이번 선거는 국민 각자가 “이 후보가 국정 수행의 최고 적임자다”라고 하는 자부심으로 투표한 것이 아니라,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무조건 싫으니까 다른 한 사람을 찍었다”라는 식의 최악의 선거였다.
선거 결과 역시 그렇게 나타났다. 2 강(强) 추세인 당선자 윤석열 후보와 낙선자 이재명 후보와의 표 차이는 0.73% (247,077 표) 초박빙이었다. ‘정권 교체’라는 명분이 ‘국민 통합’의 캐치프레이즈(catchphrase)를 누른 셈이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국민만 바라보고 국민을 섬기며 대통합을 이루겠다”는 당선자의 소감이 실질적으로 구현되기를 바랄 뿐이다. 그도 그럴 것이 OECD국가 중 우리 대한민국의 갈등 분열지수가 월등히 가장 높다(영국 Kings College, 런던연구소. 2021년 발표)는 부끄러운 통계가 확인된 선거였기 때문이다.
갈등과 분열의 아픔을 해결한 정치적 지도자를 찾는다면 당연 넬슨 만델라(Nelson Mandela, 1918-2013)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넬슨 만델라는 남아공(남아프리카공화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다. 그는 1940년 포트헤어대학 재학 중 그의 친구가 백인에게 인간 이하의 모욕을 당하는 모습을 목격하고 의분을 이기지 못하여 그 학교를 자퇴하고, 흑인의 인권을 위해 법학을 공부하고자 1943년 비트 바테르스란트대학(Wit Watersrand University)법학과에 편입한다. 당시 남아공 인구의 80%에 해당하는 흑인들은 전 국토의 13% 밖에 안 되는 지정된 흑인 거주지역의 좁은 땅에서 살아야 하는 불평등한 사회 구조였다. 당시 남아공은 흑인과 백인 간의 결혼도 금지되었고, 흑인은 백인들이 이용하는 병원이나 학교 등 공공시설에 출입 할 수도 없었다. 천주교 성당이나 기독교회도 백인 성당 / 교회, 흑인 성당 / 교회로 엄격히 구별되어 있다. 이와 같은 비인간적 불평등 구조를 혁파하기 위하여 법학을 공부한 만델라는 변호사가 되었고, 1994년 아프리카민족회의(ANC)란 단체에 가입하여 그 산하에 청년연맹을 창설하여 흑인들의 인권을 되찾고자 투쟁하는 한편, 요하네스버그에 법률 사무소를 개설하여 흑인들의 억울함을 변호하는 데 전력했다.
그러던 어느 날, 만델라는 평화 시위를 하던 흑인들을 백인 경찰들이 가혹하게 죽이는 참상을 목격하게 된다. 평화적 해결을 위해 노력하던 만델라는 이를 포기하고 무장 투쟁을 하다가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교 받고, 27년간의 옥살이를 하다가 1990년 2월 11일에 석방되었다.
1974년 유엔 가입국들이 남아공의 ‘인종 차별’ 정책을 맹비난하며 교역을 끊기 시작하는 거센 저항에 부딪히자 1990년 남아공 백인 정권은 결국 인종 차별 정책을 철폐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리고 그는 1991년 7월 아프리카국민회의 의장에 선출되었고, 1994년 4월 27일 남아프리카공화국 최초의 흑인 참여 자유총선에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350년에 걸친 네덜란드와 영국의 식민지에서 1961년 남아공으로 독립했으나 여전히 인종 차별 정책을 유지하다가 인종 분규가 종식된 것은 1990년이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는 국가(國歌)가 둘 있었다. 하나는 ‘주여! 아프리카를 구하소서’(Mungu iboriki Afrika, Nkosi Sikelel' iAfrika)이고 다른 하나는 ‘남아프리카의 외침’(Die stem vam Suld Afrika)이 그것이다. 그가 대통령에 취임하자 뿌리 깊은 인종 차별 정책에서 벗어난 흑인들은 이 국가를 바꾸고 싶어 했다. 아프리카민족회의가 열리는 회의장에는 백인들이 불러왔던 국가 ‘남아프리카의 외침’을 폐기하고 흑인들이 부르던 ‘주여~! 아프리카를 구하소서’를 새로운 국가로 바꾸어 부르자는 의견이 다수를 이루었다. 그리고 넬슨 만델라 대통령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회의장에 입장한 만델라 대통령은 사회자로부터 전통적으로 불러왔던 국가를 대신하여 흑인들이 국가처럼 부르던 곡을 부르려 한다는 보고를 받는다. 민족회의 참가자 모두는 대통령이 기꺼이 찬성하리라 믿고 대통령의 입에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런데 대통령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죄송하지만 저는 여러분과 생각이 다릅니다. ‘남아프리카의 외침’은 오랫동안 백인들을 따라 함께 불러온 국가입니다. 우리가 이를 없애고 우리 흑인들만이 부르던 노래를 부른다면 우리도 백인들과 다를 바 없는 차별주의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남아프리카공화국이 걸어가야 할 길, 즉 백인과 흑인이 하나가 되어 화합을 이루어 가는 길이 또다시 파괴되는 행위가 되고 맙니다.” 장내는 숙연해졌고 만델라 대통령의 말에 모두가 동의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공식 행사가 넬슨 만델라 대통령의 제안에 따라 두 국가(國歌)를 함께 부름으로써 평화의 사도답게 상처와 증오로 깊을 대로 깊었던 양 진영을 하나로 이루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이후 1997년, 두 곡을 조화롭게 편곡하여 ‘남아프리카의 찬가’ (Volkslied van Suid-Africa, National Anthem of South Africa)라는 노래를 정식 국가로 제정하게 되었다고 한다. 넬슨 만델라 대통령의 이 결단이야말로 ‘국민 대통합’의 국정 철학이 아니었을까?
그와 비견되는 인물은 단연 대한민국 제15대 김대중 대통령이다. 한국 정치사에서 김 대통령(DJ)은 여야, 지역을 넘어 대다수 한국인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다. 그는 박정희 독재 정권에 맞서 싸우다가 죽을 고비를 넘겼고, 전두환 신군부 시절에는 사형수로 옥고를 치루기도 했다. 평생을 반독재 민주화 투쟁을 벌였으며, 집권 후에는 정치적 보복은커녕 관용과 포용으로 모두들 품어 안았다. 박정희 대통령 기념관 건립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전직 대통령 전두환, 노태우 씨를 특별사면함은 물론 대통령 재임 시 생존해 있는 전직 대통령 내외를 청와대에 두 차례나 초청하기도 하였다. 특히 남북정상회담 개최로 남북 간에 평화 무드를 다지는 데 기여한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4수 끝에 대통령이 돼서는 기록될만한 업적을 남겼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대표적으로 IMF 외환위기(국가 부도사태)를 조기에 극복했으며, 산업화에 이어 정보화 및 벤처붐 조성으로 경제 발전의 토대를 만들었고, 일본 문화를 개방함으로써 우리 문화산업을 한층 더 발전시킨 업적은 지대하며 IT 제4차 산업에 전력투구함으로써 단연 세계를 압도하는 선진국으로 발전시켰다.
넬슨 만델라와 김대중 두 분 대통령의 공통점은 관용과 포용의 국민 대통합 정치였고, 그 정치 철학의 근저(根底)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에 있었다는 점이다.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과거의 아픔과 원한서린 상처를 잊을 수 없고, 용서 할 수도 없다. 오직 용서하게 하시는 십자가의 은혜로 말미암아 용서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용서를 위해서는 은혜의 십자가에 자신이 박혀야 한다. 결국 ‘용서’는 상대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해방되는 자유함의 비상(飛翔)인 것이다. 두 전직 대통령에게는 이 신앙의 행동화가 작동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아름다운 대통합의 역사가 새로운 대한민국의 전통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태복음 5:17-18).” 예수께서 세상에 오셔서 율법을 완성하신 뚜렷한 증거는 율법의 조문들을 신조처럼 지킨 종교적 복종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자기를 온전히 비우고 마침내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다. ‘다 이루었다’고 외치신 ‘주님의 십자가’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동시에 실현하신 거룩한 사명의 완수인 동시에 율법의 완성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실천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더 이상 절대자에 대한 종교적 숭배가 아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인격적 계명의 준수를 통해 구체적으로 실현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 이러한 대통령이 우리 역사 선상에 계속 배출되기를 염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