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재 목사
(전,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
|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한국 선교에 임한 대다수의 선교사들은 각기 교파 교회에서 파송 받은 사람들이었지만, 초창기에는 한국이라는 미지의 세계에 비전을 품고 개별적으로 내한한 선교사들도 적지 않았다.
무어(Samuel F. Moore, 1860-1906) 선교사도 이들 중 한 사람이다. 무어 선교사는 미국 일리노이 주 출생으로 몬타나대학교(Montana University)와 시카고의 매코믹신학교(MeComick Seminary)에서 공부를 하였다. 목사 안수를 받은 그는 시카고에서 북장로회선교부가 주관하는 한국 선교 상황을 접하게 되자 이에 큰 도전을 받고 1892년 1월 서른두 살의 나이로 처음 한국 땅을 밟았다.
그러나 막상 구한 말 국운이 기울어져 있던 이 땅을 밟았던 무어는 여느 선교사들과 마찬가지로 문화 충격이 컸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봉건 사회의 적폐인 계급 제도가 주는 불평등이 기독교로 개종한 교회공동체 안에서조차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는 점에 그는 주목하며, 그 적폐 타파에 주력하기로 하였다. 이미 미 북장로회 선교사로 파송 받아 전도 활동에 매진하고 있던 언더우드는 관리들이나 양반 계급들은 국가적 제전(祭典)이나 조상 제사(祭祀)를 절대 가치로 여길 뿐더러 사회적 관습이었던 소실이나 첩을 두세 명씩 데리고 살고 있는 형편에 교회가 이 악습을 척결한다는 것이야말로 쉬운 일이 아니다 라고 간파했고, 초기부터 신분이 낮은 서민들에게 초점을 맞추어 선교 사역에 헌신 했던 것이다.
무어는 언더우드의 지도와 조언을 받으며 사회적 가장 하류층인 백정(白丁)에게 집중하기로 마음먹고 열심히 기도로 준비하였다. 당시 백정들은 호적도 없고 의관(衣冠)의 착용도 용납되지 않았으며, 천민 외의 다른 평민과 혼인도 할 수 없었던 처지였다. 무어는 이런 상황에 놓여 있던 백정들에게 많은 관심을 갖고 서울의 관철동(貫鐵洞) 백정 부락에서 그들의 신분 향상을 위해 많은 애를 쓰는 한편, 고종 황제에게 청원하여 백정들도 갓을 쓸 수 있게 해 달라는 청원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지금으로부터 불과 120여 년 전만 하더라도 우리나라는 철저한 계급 사회였다. 황제가 있었고, 왕궁을 출입할 수 있는 신하들도 계급이 뚜렷했다. 물론 인구의 대다수는 ‘평민’이라 불리는 피지배 계층이었고, 그 중에는 성(姓)조차 가질 수 없는 천민이나 노비도 많았다. 이와 같은 시대적 배경에서 시작된 초기 한국 교회에서의 복음 사역은 신분에 따른 계층 간 갈등은 입교(入敎)에까지 미쳤다.
그렇다면 무어 선교사가 이처럼 신분 타파에 올인 했던 것은 왜였을까? 그것은 ▲첫째,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다(롬 10:12)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이 땅에 구현하기 위해서였고, ▲둘째, 사회적 도덕적 퇴행 폐습(축첩, 도박, 흡연 등)과 남녀 차별을 척결해야만 건전 사회를 이룰 수 있다는 예수 혁명 정신 때문이었다.
1894년 사무엘 무어 선교사가 서상륜 장로의 도움을 받아 16명의 교인으로 세운 곤당골교회를 모체로, 현재 종로2가 인사동에 있는 승동교회는 일제 강점기 민족 운동과 사회 운동의 주축이 된 교회였다. 진취적이고 활동적인 교회였음에도 초기 한국 기독교사에서 어떤 신분 갈등이 있었는지를 잘 보여 주는 사례가 되는 교회이다. 곤당골교회 안에 「예수학당」이라는 소규모 학교를 열어 교육에 힘쓴 무어 선교사는 한 학생의 부친(이후 기독교인이 되고 세례를 받은 뒤 ‘박성춘’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백정)이 장티푸스에 걸려 죽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당시 장티푸스는 치료가 매우 어려운 죽을병에 가까웠다. 위생 관리만 철저히 하면 걸리지 않을 수 있는 병이었지만, 백정 신분이었던 박성춘은 관리는커녕 치료조차 받을 수 없는 형편이었다. 무어 선교사는 자신과 함께 활동하던 제중원(濟衆院, 조선 시대 최초의 근대식 병원)의 올리버 에이비슨(Oliver R. Avison, 세브란스·연희전문학교 교장 역임)에게 박성춘의 치료를 부탁했다. 당시 에이비슨은 왕실 주치의로 활동했는데, 고종의 주치의가 최하 계급인 백정을 치료했던 것이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캐나다 선교사 에이비슨의 치료로 죽을 고비를 넘긴 박성춘은 무어 선교사의 전적인 도움으로 완쾌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로 곤당골교회에 출석하게 되었고, 이때 ‘회심’을 하고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당시 곤당골교회에 출석하는 이들은 대부분 양반이었는데, 이들은 백정 출신의 박성춘이 교인이 된 것을 단호히 반대했다. 양반과 상놈 중의 상놈인 백정이 한 공간에 있을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무어 선교사는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누구나 똑같이 평등하고 고귀한 인격체이며, 더군다나 교회 안에서 신분에 따라 차별하는 행위는 옳지 않다고 양반들을 설득했다. 그러나 수백 년 동안 계급 문화에 젖어 있던 이들에게 ‘평등’은 실현되기 힘든 가치었다. 극심한 갈등을 거듭한 끝에 곤당골교회의 주축이었던 양반들은 자기들끼리만 모일 수 있는 교회를 설립하기에 이른다.
한편, 박성춘은 곤당골교회에 입교한 후 내부(內部)에 신분상 원통함을 상소하여 평민으로 해방되었다. 이 일 이후 수많은 백정들이 교회로 몰려 왔으며, 이는 교회 안에서 양반들과 같은 위치에서 그들을 ‘형제’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양반들은 상대적으로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무어 선교사의 헌신으로 수많은 백정들이 세례를 받았으며, 교회를 지금의 주소 인사동으로 옮기면서 ‘승동교회’로 개칭하였다.
1911년 박성춘이 승동교회의 장로로 피택되자 이에 반대한 양반 계급은 ‘안동교회’(安東敎會)를 개척하기에 이른다. 물론 백정 출신인 박성춘이 장로로 임직되었을 때 왕족이었던 이여한 장로가 교회에 잔여하여 있었기 때문에 왕족과 백정이 한 공동체를 이루는 ‘보편적인 교회’(Catholic Church)를 실현했다고 평가 할 수 있지만, 끝끝내 계급 격차를 극복하지 못하고 백정교회와 양반교회로 분열된 상처는 분명한 흠집이다.
이와 같이 박성춘은 백정 출신으로 갖는 수모와 고초를 겪어야 했지만, 박성춘의 아들 박서양(朴瑞陽)은 제중원의 제1회 졸업생이 되었고, 자신의 아버지를 살린 에이비슨 선교사와 함께 10년 간 제중원에서 의사로 많은 생명들을 살려냈다.
조선 땅에 발을 디딘 지 14년 만인 1906년, 기독교의 참된 가치인 ‘평등’을 실현하고자 계급 철폐를 외쳤던 무어 선교사는 정작 자신이 걸린 장티푸스를 치료받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그가 남긴 백정 해방운동, 나아가서 만인평등 사상운동은 당시 조선 사회에 크나큰 의식 변화를 불러 왔다.
“링컨 대통령의 노예해방 선언으로 자유를 얻은 흑인들의 기쁨보다 한국 백정들의 기쁨이 더 컸었으리라.” 마사 헌틀러(Martha Hantler) 선교사의 극찬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으로서 선진국 대열에 우뚝 서게 된 동력은 전적으로 초기 선교사들에 의해 기독교 정신의 초석에 있었다는 점은 아무도 부인 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이와 같이 초기 기독교는 계급 제도를 타파 할 수 있는 희망이 되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21세기에 서 있는 한국 교회에는 과거 철저한 계급 사회였던 우리나라에서 ‘평민’(平民)이라는 단어가 익숙하듯이 교회에서 ‘평신도’(平信徒)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유감이다. 그리고 기억하자. 애초부터 평신도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