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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칼럼]3.1운동과 한국교회(Ⅰ) - 김상열 장로




김상열 장로
(목포남부교회 원로)


“역사를 알아야 내일을 알고, 미래가 보인다. 역사는 미래를 비추는 오늘의 거울이다.”


역사학자이시며 독립운동가 단재 신채호 선생은 “역사를 망각한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라고 했습니다. 3.1 운동은 실제적으로 기독교가 주도한 운동이었습니다. 금년 3월 1일로 103주년이 되었습니다. 33인 중, 16명이 기독교인이었고, 태화관에서 한용운의 만세 삼창을 끝으로 33인 모두 연행되었지만,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것은 경신학교 출신의 정재용이었습니다. 전국에서 이 운동이 일어날 때, 집결지는 교회나 기독교학교였고, 앞장 선 사람들도 기독교학교 교사나 학생들이었습니다. 3.1운동에 참여했던 기독교 민족 대표는 민족적 양심과 종교적 신앙심을 연결시켰습니다. 오산학교 교장 이승훈 장로, 서울수표교회 신석구 목사가 그 대표적 인물입니다. 이승훈 장로는 기독교 천도교의 합동 거사에 결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거사 후에 체포되어 심문받을 때 일본 재판장 앞에서 3.1운동은 하나님이 주신 기회였고 민족적 자존심이 일본의 수모를 견딜 수 없다고 참가 동기를 피력했습니다.


3.1만세운동 8일 후 1919년 3월 9일 일본 총독부 내부국장이었던 우사미가 주선하여 일본 감리교선교사 스미스집에서 총독부 고위관리들과 선교사들과의 회담이 있었습니다. 감리교 선교사로는 노블과 하디장로교 선교사로는 게일 베른하젤 등이 참가했습니다. 3·1운동은 1919년 3월 1일 서울의 파고다 공원과 태화관을 비롯하여 전국 8~9 지역에서 동시에 한국의 독립을 선포하면서 시작한 거족적인 독립운동으로, 그 뒤 1년여 동안 계속된 국내외의 항일 민족독립 운동을 총칭하는 말입니다. 이 운동은 지역과 계층, 종교와 이념, 남녀노소를 초월하여 이루어진 한국의 독립을 쟁취하려는 중요한 항일 독립운동으로, 초기의 운동 주체가 종교인들이기 때문에 그 종교사적 의의가 클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이라는 민주국가를 출발시킨 ‘3.1혁명’으로도 간주되기 때문에 그 정치사적 의미 또한 매우 큽니다. 3월 1일로 거사 일자를 정한 것은 1919년 1월 22일에 돌아가신 고종의 장례일을 3월 3일로 정한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당시 고종의 ‘독살설’까지 나도는 상황에서 울분에 쌓인 백성들이 장례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로 모였기 때문에 3월 3일 인산일(因山日)전후를 고려한 것입니다. 실제 서울역 하차 인원이 매일 평균 1,500~1,600명이던 것이 2월 26일 3,000여명, 27일 6,000여명으로 늘어났습니다. 장례일 전날은 주일이어서 기독교인들을 배려하느라 3월 1일로 정했습니다. 만세운동은 4월 말까지 집중적으로 일어났다가 점차 퇴조하게 되었는데, 이는 일본 군경의 탄압이 가혹한 데다 파리강화회의에서 조선독립문제를 논의하지 않기로 했다는 보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집회는 하루에 67회나 일어난 4월 1일을 정점으로 4월 11일까지는 매일 10회 이상 일어났습니다. 박은식의『한국독립운동지혈사』는 1년간 1천만 명이 참여했다고 증언합니다. 만세운동은 독립선언서의 공약 3장에 따라, 비폭력 평화적인 방법으로 진행되었지만, 일제의 총검에 의한 무차별 살육으로 한국인 사상자가 많이 났습니다. 일제 측 통계에 의하면, 그 해 3~5월까지 46,948명이 체포, 투옥되었고, 2만 명에 가까운 이들이 미결수 혹은 기결수로 수감되었으며, 15,900여 명이 부상당했고, 7,500여 명이 살해당했습니다. 47개의 교회당과 2개의 학교, 그리고 715채의 한국인 민가가 소각 당했다. 폭력에 의해 한국을 강점한 일제는 언론, 결사, 집회의 자유와 정치, 사상의 자유를 박탈했고 생존권을 위협하고 한국인을 공포로 몰아넣었습니다. 그들은 치안 대책으로 태형을 부활시키는 등 조선인의 일상생활을 겁박했습니다. 1911년 1만 8천여 명에 달하던 즉결처분이 1918년에는 8만 2천 명으로 늘어났고, 동맹파업도 1916년에 6건에 362명이던 것이 1918년에는 50건에 4,500여 명으로 늘어났습니다. 쌀값이 1914년에 평균 1석당 평균 15원 선이던 것이 1917년 말에는 20원 선이 넘었고, 1919년 3월에는 40원을 상회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일제 강점 초기, 식민지 백성의 삶을 옥죄고 있는 사회 경제적으로 비참한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1918년에 끝난 세계 1차 세계대전은 피압박민족에게 새로운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민족자결 원칙’을 주장했는데, 이것은 오스트리아 제국과 러시아 제국 및 터키 제국의 지배하에 있던 유럽의 백인 기독교도들에게 적용되는 원칙이었습니다. 민족자결 원칙에 따라 유고슬라비아,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등 8개국 유럽 나라들이 해방과 독립을 맞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시아 아프리카의 비백인, 비기독교도 식민지 민족에게는 이 민족자결 원칙이 적용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베르사유 조약안 440개 조항 가운데 조선 문제는 아예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일본에도 대표를 파견, 독립운동을 논의하고 이광수는 2.8독립운동의 선언서를 작성하고 상해로 돌아왔습니다. 한편 여운형 등은 만주와 연해주를 방문, 그곳에 체류하고 있는 독립운동가들을 만나 독립운동을 고양했습니다. 이리하여 3.1운동 직전에 간도 노령 지역에서「대한독립선언서」가 발표되고 일본 유학생들을 중심으로「2.8독립선언」이 발표된 것은 3.1운동 발발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주목되는 바는 3.1운동이 종교계를 중심으로 준비되었다는 점입니다. 일제 강점 후 대부분의 언론․사회단체가 해산된 가운데 민족운동을 이끌 수 있는 마땅한 조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종교단체는 집회가 가능했고 교단마다 산하 지방 기구가 조직되어 있었습니다. 천도교의 경우 1905년에 동학에서 천도교로 개명한 이래 전국적인 대조직을 갖고 있었습니다. 천도교와 불교의 연대에는 최린과 한용운의 노력이 컸고 기독교와의 연대에는 105인 사건이래 민족운동으로 촉망받던 이승훈이 큰 영향력을 발휘했습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일제 강점 하에서 종교기관만이 치외법권적으로 유일하게 합법적인 집회활동의 공간을 가질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종교계가 3.1운동의 중심 역할을 하게 된 이유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 주목할 것은 한국 기독교인들의 민족운동 참여를 경계했던 선교사들의 ‘정교분리 원칙’의 강조가 역설적으로 한국 기독교인들이 민족운동에 참여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게 만들었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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