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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기독교역사연구소장 김양호 목사 |
그의 기도는 오래가지 않아 실현되었다. 아니, 그 열매는 기대 이상으로 풍성했고 풍족했다. 그때만 해도 이제 막 하나의 교회가 시작되었을 뿐인데 2021년 가을 목포 교회는 450여개로 성장하고 발전했다. 지금으로부터 123년 전, 목포를 처음 찾아오던 날 오웬 선교사는 유달산을 바라보며 이렇게 소원했다. ‘나는 주일에는 교회에 갈 수 없지만, 이 산들이 언제나 교회의 종소리를 메아리 쳐 울릴 것인가?’
오웬은 1867년 7월 19일 버지니아 주 블랙 월넛에서 태어났다. 햄든시드니 대학을 졸업하고, 유니온에서 신학을 하였으며, 도중에 스코틀랜드 에딘버러 대학에서도 공부하였다. 햄든시드니는 미국에 정착한 아이리쉬 스코틀랜드 사람들이 세운 대학으로, 유니온은 햄든 대학의 신학부로 시작한 신학교다. 오웬은 유학중 유럽을 다니며 해외선교에 대한 꿈을 키웠고, 의료 선교에 대한 중요성을 깨달았다. 그는 버지니아 의과대학을 수료, 의사 자격도 함께 취득하였다.
오웬은 뉴욕에서 의사로서 실습하는 동안 한국 교회와 선교에 대한 이해를 갖게 되어 한국 선교를 결단하였다. 그리고 미남장로교 선교사로 헌신, 파송 받아 1898년 11월 6일 목포에 도착하였다. 오웬은 목포 양동에서 일을 하면서, 때론 밤마다 맞은편 유달산 언덕에 촘촘히 들어서있는 집들의 반짝이는 불빛을 바라보았다. 어둠을 비치는 불빛, 그 등불을 밝히는 기름은 자신의 고국 미국에서 온 것이었다. 그는 목포의 어둠을 밝히는 미국산 기름처럼, 목포의 영적 어둠을 빛으로, 생명으로 바꾸는 일에 자신의 인생과 선교 사역이 기꺼이 영적 기름처럼 소모되길 소원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불타며 비추이는, 저 완전한 날을 더욱 더 비추이는 빛’이 되었으면 한다. 한국인들은 기름을 사용한 후에, 미국에서 이곳으로 기름을 날라 온 통들을 물을 나르는데 사용한다. 우리 조국(미국)은 한국의 빛의 출처일 뿐만 아니라, 각 가정에 신선한 물을 나르는 통들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 아닌가? 우리도 주님이 사용하시는 통들이 아닌가? 주님께서 우리를 이곳에 보내신 목적은, 질그릇과 같은 우리를 사용하셔서 이 사람들에게 생명의 물을 공급하고자 하심이 아니겠는가?”(‘더 미셔너리’, 1899. 9).
■ 진료소 원장과 목포교회 2대 목사로
그는 목포에 도착하는 대로 바로 진료소를 열었다. 전라남도 최초 서양식 병원이었다. 종래의 한의사의 처방과 한약으로만 치료받던 환자들은, 양의를 전공한 서양 의사로부터 진료와 양약을 통해 보다 좋은 의료 도움을 받았다. 오웬 진료소는 늘 환자들로 붐볐다.
오웬은 의사이면서 동시에 가장 왕성한 전도자의 삶을 살았다. 많은 환자를 진료하느라 늘 지치고 힘들었지만, 그럼에도 틈만 나면 밖에 나가 전도하며 복음 전하는 일에 열심을 쏟았다. 그 일에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고 참으로 소모되는 기름처럼 헌신했다. 바닷가에 나가 선원들에게 전도지를 나눠주거나, 때론 배를 타고 멀리 섬을 돌며 생명의 빛을 나눠주기도 했다.
오웬의 진료소 운영과 전도로 목포 교회는 차츰 성도들이 늘어가기 시작했다. 오웬이 처음 목포에 왔을 때는 10명 남짓이었으나, 1년여 지난 다음해 1899년 10월에는 주일날 예배에 평균 30여명이 출석했을 정도로 오웬의 선교 사역은 생명력이 있고, 선한 열매가 이어졌다. 목포교회는 유진 벨에 의해 설립되고 시작되었는데, 오웬이 합류하며 의료 사역으로 힘을 보태니 교회가 자라고 성장하였다.
그런데, 이제 막 걸음마를 떼던 목포교회는 사모를 잃는 슬픔을 당했다. 유진 벨의 아내 로티가 1901년 봄 사망하자 유진 벨은 자녀를 데리고 일시 미국으로 돌아갔고, 그 공백을 오웬이 담당하였다. 목포교회는 오웬의 담임목사 사역을 알아야 하고 인정하며 기억해야 한다. 레이놀즈 목사는 1902년 3월에 목포교회에 부임하였다. 유진 벨이 미국으로 떠난 1901년 5월부터 1902년 3월 사이 공백을 오웬이 목회하였다. 그때 목포에는 여선교사 스트래퍼와 오웬 부부 3명이 있었다. 오웬은 의사이면서도 동시에 신학교를 졸업한 목사였다. 오웬의 아내 조지아나 휘팅 선교사는 자기 남편이 목포교회 목사로서 토요일 밤 늦게까지 설교준비하고 있다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목포교회 담임 사역자는 1대 유진 벨, 2대 오웬, 3대 레이놀즈 순으로 고쳐져야 할 것이다.
■ 전라남도 교회 개척자, 오웬
유진 벨과 오웬은 후배 프레스톤에게 목포 사역을 인계하고 자신들은 1904년 광주로 옮겼다. 광주에 센터를 마련하므로 전라남도 일대에 보다 광범위하게 전도사역을 펼치게 되었다. 유진 벨이 광주 시내와 북쪽을 주로 맡았다면, 오웬은 광주 아래 나주와 동남쪽을 다니며 순회하였다. 여수, 순천, 광양, 보성, 장흥 등지는 오웬이 처음 직접 다니면서 전도하니, 차츰 이곳에도 교회가 세워졌다. 그의 전도행전엔 늘 지원근을 비롯한 여러 조사들이 동행했다. 조사들의 협력을 받으며 오웬 선교사는 전남 일대 곳곳을 발로 뛰고 걸으며 전도하고 구령에 열정을 지폈다. 그렇게 전라남도 각 고을마다 세운 교회가 수십, 수백을 헤아리며, 그의 영향으로 예수 믿고 신자가 된 이는 가히 셀 수가 없다.
목포의 교회를 성장시키고, 전남 일대 곳곳의 교회는 오웬이 다 개척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먼저 사역했던 유진 벨이 명목상 선배로서 지역의 책임자요 대표였지만, 실제 일과 사역의 열성과 열매는 오웬의 수고와 땀으로 이뤄진 게 목포와 전라남도의 기독교 교회다.
전라도에서의 삶과 사역이 익숙해질수록 오웬은 복음 전도자로서의 사명을 더 충실히 하였다. 지나칠 만큼 날과 시간을 쪼개, 전남 일대를 다니며 전도하고 전도하였다. 가정의 식구들에겐 서운하리만큼 밖으로만 다니며 일했으니, 오죽하면 어린 딸이 “왜 아빠는 집에서 지내지 않나요?”라고 했을까? 자신의 가정도 중요하지만, 도처에 죽어가는 생명들에 대한 그의 안타까움과 열정이 훨씬 더했다. 그 열심히 결국 건강과 생명에 심각한 위험을 초래하였다.
1909년 봄, 멀리 장흥까지 전도여행을 다니던 중 갑작스런 꽃샘추위로 급성폐렴에 걸려 결국 사망하고 말았다. 42년 인생이었으며, 조선에 선교사로 와, 목포와 전남에서 11년간 그야말로 불꽃같은 전도자의 삶을 살았다. 장례를 집례 했던 프레스톤 목사는 그를 ‘죽도록 충성한 종’이었다고 술회했다. 오웬은 광주 양림동 선교부 묘지에 누워있고, 그를 기념한 오웬각은 양림동 간호대학 내에 지금도 현존한다.
누가 그를 기억하랴? 누가 그의 헌신과 열정을 오늘에 이으랴? 조선과 전라도 사람을 존중하고 영혼을 뜨겁게 사랑하며 물질과 시간을 온전히 드려 헌신하고 충성했던 하나님의 전도자, 오웬. 목포 유달산에 교회 종소리 염원하던 그의 간절함이 오늘 양을산에, 부주산에, 삼학도에, 하당과 남악에, 그리고 전라도 곳곳에 교회가 세워지고 생명의 역사 풍성히 잇고 있으니 그를 기리고 기억하며 하늘의 비밀스런 경륜을 찬양하고 높임이 마땅하도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