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재 목사
(전,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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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이 땅의 목사들과, 그 목자들에 의해 양육 받은 교인들의 실태에 대한 글 한편을 옮겨 쓴다.
“주여, 주의 양들이 주렸나이다. 목말랐나이다. 삯꾼들이 주는 꼴은 참꼴이 아니로소이다. 제 생각, 제 솜씨로 장만한 꼴이로소이다. 주여, 그들에게 참꼴이 없나이다. 주의 살을 먹여 줄 목자가 없나이다. 주의 피를 마시울 그 아무도 없나이다. 오, 주여!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다 갖추어져 있나이다. 주여, 누구를 보내어 주의 양을 살리시려 하시나이까? 생명의 양식을 주시려 하시나이까? 오, 주여!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
이 글을 쓴 분의 눈에는 목자다운 참 목자를 찾아 볼 수 없는 아픔을 여과 없이 토로하면서 선지자 이사야처럼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고 있다.
언제 때 이야기겠는가? 이 글은 1931년에, 당시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일제 검경의 검속을 피해 다니다가 병사한 차재선 전도사의 글이다. 그 때 그의 나이 불과 서른세 살이었는데, 그 강직한 젊은 전도사의 눈에 당시 목사들은 모두 삯꾼으로 비춰졌던 것이다.
일제 군국주의자들의 회유와 강압에 굴복하여 기독교 복음의 핵심 가치는 허망하게 포기하거나 동조한 대부분의 목사들의 형태가 품팔이 삯꾼인 종교 직업인으로 전략한 모습에 절망하며 쓴 차재선 전도사의 이 글은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패망으로 우리 조국의 광복 이후에도 그들에게는 일말의 양심의 가책이나 통회 자복하며 목사직, 장로직을 내려놓는 참회로 이어지는 이는 전혀 없었다. 알려지기로는 눈물의 예레미야로 불리운 고봉(高峰) 김치선 (金致善) 박사 (대한신학교, 현 안양대학교 설립자) 한 분뿐인 듯싶다.
순교와 고난으로 주검을 이겨낸 출옥 성도들이 변절하여 일본 우상을 섬긴 한국 교회 자칭 지도자들을 통해 <자숙>을 권고하자 강력히 반대했던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7회 총회장을 지낸 홍택기 목사는 다음과 같이 궤변을 늘어놓았다. “옥중에서 고생한 사람이나 교회를 지키기 위하여 고생한 사람이나 고생은 마찬가지다. 교회를 버리고 해외로 도피 생활을 했거나 은둔 생활을 한 사람의 수고보다는 교회를 등에 지고 일제의 강압에 할 수 없이 굴한 사람의 수고가 더 높은 평가를 받아야 한다. 신사참배와 동방요배에 대한 회개와 책벌은 하나님과의 직접 관계에서 해결될 성질의 것이다.” 말문이 막히지 않은가? 통탄스럽게도 친일 행위 최전선에서, 그것도 십계명의 제1계명에서 제4계명을 범하고 일제에 부역(賦役)했던 목사의 입에서 뱉어낸 이 사고(思考)가 오늘의 사회적, 신앙적 갈등 구조의 원천이었던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신사참배라는 우상 숭배를 국민의례(國民儀禮)라고 강변하며 친일전선에 앞장섰던 그들에 의해 광복 후에는 한국 교회 재건을 명분으로 앞장서면서, 일제의 부와 권력과 명예를 그대로 고스란히 계승하며 군림(君臨)해 오고 있는 근·현대 흑역사는 부끄럽게도 지금까지 엄존하고 있다.
전호에서도 언급한 바 있거니와, 1949년 4월, 반민족친일분자로 정부의 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되었던 목사 전필순, 정춘수, 김인선, 양주삼, 정인과, 김길창 씨 등의 기소의견서에 따르면 1)교인의 황민화운동(皇民化運動) 추진 단체의 수뇌 인물, 2)황민화운동, 신사참배 선동, 동방요배, 민족정신 말살 운동에 선봉, 3)신사참배에 반대하는 목사, 교인을 일본경찰과 결탁하여 밀고, 탄압하게 함, 4)기미 3.1 만세 사건은 쓸 데 없는 장난이었고, 민족 대표 33인은 사리사욕을 채우려다가 실패한 사건이라고 폄훼함으로써 위대한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선열에 대한 모욕죄라고 적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친일반민족행위자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 조사관들의 조서에 명시된 그들의 친일 부역 행위에 대한 공통된 답변은 오로지 조선의 교회를 살리고 유지하기 위한 몸부림치는 고육지책이었지, 결코 정치적, 종교적 범법행위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한국판 <쉰들러 리스트>의 쉰들러(?)였다는 그들의 주장에 공분을 느낄 뿐이다. 더욱이 통탄할 것은 국내 정치적 조직 기반이 전혀 없던 이승만 대통령은 그해 6월 반민특위를 해체하고 피의자들 전원을 8월 10일에 기소유예로 풀어 주었다.
전필순(全弼淳, 1897-1977)목사는 1941년 4월 서울 연동교회 부임한 친일 부역자다.
그는 영·미 타도에 앞장서는 종교지도자 행세를 하면서 전국 순회 강연회 강사로 일제의 나팔수 노릇을 했다. 1943년 4월에는 새로 조직된 일본 기독교 조선혁신교단의 통리(統理)가 되었다. 한편, 조선예수교장로회 부총회장으로 연임하면서 최지화, 김응순 총회장과 친일 행위를 하다가 조국의 광복을 맞이했다. 전필순 목사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해방 정국(解放政局)에 불안을 느낀 그는 연동교회 위임목사 사임서를 연동교회 공동의회 앞으로 제출했다, 목사의 소속이 노회에 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는 그런 꼼수를 부린 것이다. 소집된 공동의회에서는 전필순 목사를 재신임했고, 그 여파를 몰아 교회 정치 일선에 화려하게 부활하여 총회장을 역임하며 연동교회 원로목사로 추대되었음은 물론 장로교 총회를 좌지우지하였다.
1938년 9월 장로교 경남교회 부노회장으로 제27회 총회 총대로 참석하여 부총회장으로 피선된 김길창(1892-1977)목사는 신사참배결의안을 불법으로 가결한 다음날 그가 각 노회장을 인솔하여 평양신궁에 참배했는가 하면 부산 항서교회(港西敎會)를 33년 간 시무하고 원로 목사로 은퇴하기까지 광복 전후의 행적에서 예수 믿는 흔적을 찾아 볼 수가 없다. 일제 강점기에는 일제 황민화, 즉 민족 말상 정책에 앞장서서 성도들을 탄압하며 신사 참배를 강요하여 인솔한 것은 물론, 올곧고 민족혼이 살아있는 성도들을 일제 경찰에게 밀고하는 행위도 서슴치 않은 반역 죄인이었다. 그러던 그가 조국 광복 후 반민특위에서 기소유예로 풀려나자 멸공투사(滅共鬪士)요, 교육가로 옷을 갈아입고 부산을 중심으로 여러 학교재단을 설립 운영하는 수완을 보이며 과거의 행실을 세탁하고 사학 재벌로 얼굴을 내밀었다. 부산남성초교, 남성여중고, 대동중고, 광성공고(현, 경성전자고), 훈성여고(현, 부산계성여고), 거제중(현, 거성중), 경성대 등이 바로 그의 바벨탑이다. 그 밖의 4인도 대동소이하였다.
필자가 이렇듯 과거 친일 부역을 밝히는 이유는 소위 ‘목사’(Paster)라는 신성하고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거룩하고 선택된 직분자가 기독교의 경전인 성경의 원리를 정면으로 부정하고 배도했던 큰 죄악을 범했으면, 그 직을 스스로 내려놓고 평생을 하나님께 참회하는 심령으로 몸부림쳐도 모자랄 판에 교회 앞에, 그리고 위대한 조국 대한민국 앞에 ‘역사의 죄인이었음을 고백하고 자중자애하는 것이 바람직함에도 그러기는커녕 일제에 누렸던 부와 권력과 명예를 고스란히 활용하며 한국 교회와 나라의 헌정 질서를 유린했다는 그 쓴 뿌리가 오늘날까지 우리 민족의 아픔이 되고 있다는 점에 통탄을 금치 못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공적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자. 마태복음 4장17절이다. “이 때(세례 요한의 투옥)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예수님의 지상 사역 전체의 주제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는 것”(눅5:32)이 주님 오심의 목적이었기에, 당시 기득권자들 앞에 담대하게 서서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눅13:3,5)고 선포하셨다.
회개(metanoia)는 회심의 중요한 요소이다. 그러므로 신학자 루이스 벌콥(Louis Berkhof)은 “참 회개는 믿음과 연계되지 않고는 결코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참된 믿음이 있는 곳에는 참된 회개도 있다. 이 둘은 분리될 수 없으며, 동일한 과정의 보완적인 부분일 뿐이다”라고 설파하였다. 주를 믿는 자를 능멸하러 다녔던 바울의 다메색 도상에서의 회심을 보자(행9:1~18, 갈1:17-18). 그가 곧바로 아라비아 광야로 가서 3년 동안 머물렀던 것은 과거의 자아를 완전히 깨뜨려 부수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갖고자 철저한 회개를 통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과 신학을 재정립하는 치열한 자기와의 싸움이었고 이방인의 사도로서 부족함이 없도록 준비하기 위함이었다. 3년이라는 기간은 관계 정립이 그만큼 쉽지 않았다는 뜻일 것이다.
앞서 차재선 전도사의 글과 1935년 김교신 선생의 글은 1930년대 한국 교회는 목사다운 참 목자를 찾아볼 수 없는 아픔을 바로 정치꾼 목사들의 친일의 덫에 갇혀버렸던 증거이며, 그 악습은 8.15 해방을 거쳐 제1공화국에서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마음과 생각과 의지의 근본적 변화 없이는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올 수 없다. 회개는 완전한 돌이킴과 궁극적으로는 전적인 변화로 이어지는 영적 새사람을 요구한다. 이것이 성경이 인정하는 유일한 종류의 회심이다. 슬프게도 신사참배에 앞장섰거나 동조했던 대부분의 목사(?)들에게 회개는 없었다. 죄를 버리는 회개 없이는 구원도 없다, 구원은 그래서 쉽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