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재 목사
(전,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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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제국이 우리 조국을 침탈하여 민족혼을 말살하는 가운데 특히 하나님을 배도하는 암울한 상황에서도 한 줄기 생명의 빛을 더욱 찬란하게 비추게 한 것은 순교자의 역사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열한 제자들에게 분부하신 지상명령(至上命令)은 복음의 ‘증인’이 되라는 말씀이었다(마 28:18-20;행1:8). 주님이 분부하신 이 ‘증인’은 Witness, 사건의 객관적 증인의 사명을 뛰어넘어 Martyr, 즉 ‘순교자’가 되라는 명령이었다. 그러므로 2천 년 기독교 역사는 순교의 역사라고 축약할 수 있다.
1938년 9월의 조선장로교 제27회 총회가 일제 관헌의 강압에 의해 신사참배 결의를 했을 때, 그들의 간악한 협박과 회유에도 끝까지 신앙의 절개를 지키면서 우상 앞에 머리 들고 나선 우리 민족 교회 순교의 사표(師表)들은 그 순간에도 빛났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고 주기철(朱基徹, 1897-1944) 목사이다. 그 분은 한국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가장 빛나는 순교자이시다.
주 목사는 경남 창원에서 부유했던 주현성 장로의 7남매 중 4남으로 태어나 고향 개통소학교를 졸업하고 1912년 평북 정주 오산학교에 진학하여 20세에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오산학교는 남강 이승훈 장로가 설립하였고, 고당 조만식 장로가 교장으로 봉직한 사학으로 당시 학생들은 그분들의 신앙과 민족의식을 고취 받아 항일적 기상이 강한 학교여서 주 목사가 훗날 신사참배 반대의 서릿발 같은 절개를 이끌어 준 정신적 지주가 된 곳이다.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연희권문학교 상과에 진학하였으나 평소에 않던 안질이 심하여 학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게 되자 고향 교회 집사로 섬기던 중 김익두 목사의 사경회에서 중생의 체험과 더불어 김익두 목사의 안수로 안질 치유까지 받자 1921년 평양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여 1926년 30세에 졸업하였다. 부산 초량교회에서 6년 간 목회를 한 후, 마산 문창교회에서 5년 가까이 시무하던 중 오산학교 은사인 조만식 장로가 창원까지 내려와 주 목사를 평양산정현교회 담임목사로 청빙하자 주 목사는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믿고 옮겼다. 산정현교회는 주 목사의 투철한 신앙관과 참다운 겸손, 그리고 박애 정신을 높이 평가하여 청빙하였던 것이다, 주 목사는 신사참배에 반대하여 모두 네 차례 투옥되었다. 그가 산정교회에 부임하고 곧장 예배당 신축 공사에 착수하여 완공을 하고 헌당하기 직전인 1938년 2월, 처음 투옥되었고, 같은 해 8월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7회 총회를 앞두고 반대 세력 예비 검속으로 또다시 투옥되었으며, 이듬해인 1939년 8월에 세 번째로 투옥되었고 마지막으로 1940년 5월에 투옥되어 1944년 21일, 4년여 간에 수형(囚刑) 생활 끝에 평양 형무소에서 순교하였다. 옥중에서 그는 자신을 설득하려는 목사들에게 “인간이 얽히고설킨 인정의 줄에 나를 얽매지 말라” 당부하며 끝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하였다. 일제 경찰은 당시 평양노회장 최지화(崔志化) 목사를 불러 주 목사를 파면하라 권고했다. 주 목사를 투옥한 일제 경찰은 목사직 사면을 강요하며 온갖 고문을 가했으나 거부당하자 최지화, 박용률, 이인식 목사들로 하여금 회유와 사면을 종용했으나 주 목사는 “내 목사직은 하나님께 받은 것이니, 하나님이 그만두라 하시기 전에는 사면 못합니다”라고 완강히 거절하면서 “도대체 당신들은 양심이 있느냐?”고 강하게 책망할 정도였다. 평양노회는 1940년 가을노회에서 “주 목사는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와 총회장의 경고문을 무시하였다”는 이유로 면직하였고, 존경은 커녕 오랜 기간 한국 교회에서 잊혀졌다가 1997년이 되어서야 목사직이 복권되었다. (2006년 대한예수교수교장로회 (통합측) 평양노회와 장신대학교에서 학적 복적 선포 / 2015년 합동측 복적) 한 마디로 광복 후 7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한국 교회가 주 목사를 위해 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는 반증이다. 왜 그랬을까? 전국 목회자 거의 모두가 변절하여 친일 행위를 했으면서도 참회한 사람이 거의 전무했기 때문이다.
1964년 재미 소설가요 영문학자인 김은국(Richard E. Kim)이 처녀작으로 세상에 내놓은 영문판 소설 <순교자> The Martyred는 한국계로는 최초로 노벨 문학상에 노미네이트되었던 명작으로, 이를 소개함으로써 순교적 신앙이 어떠해야 함을 배우고 싶다. 소설은 대학 강사 출신의 정보부대 장교 이 대위가 장 대령이라는 지휘관과 국군이 탈환한 평양에서 6.25 한국전쟁 바로 직전에 있었던 평양 지역 목사 여덟 사람과 지방의 목사 여섯 사람이 공산당 비밀경찰에게 체포되어 그 중 열두 사람이 학살당한 사건을 조사하던 중 진실을 은폐하고 공산 정권의 무자비함을 선전하려 그들을 ‘순교자’로 만들려는 장 대령과 이를 반대하는 이 대위와의 갈등으로 시작된다. 유일하게 신 목사(47세)와 한 목사(28세) 두 사람만 살아남게 되는데 이들 중 한 목사는 정신 이상자가 됐고, 유일한 증인이라 할 수 있는 신 목사는 살아남아 반역자로 지목 받아 온갖 수모를 당하지만 침묵으로 일관한다. 평양을 탈환한 국군 정 대령은 열두 명을 ‘순교자’로 봉하기 위한 행사를 대대적으로 계획하는 가운데 성도들은 신 목사를 비굴한 변절자로 몰아, 그의 집 앞에 침을 뱉고 지나가지만 신 목사는 여전히 입을 열지 않는다. 그러다가 열두 명의 목사를 처형한 지휘관이었던 인민군 소좌라는 사람이 국군에 의해 체포되면서 그 사건의 전말이 백일하에 드러나게 된다. 실인즉 12명의 목사들은 순교한 것이 아니라 인민군 비밀경찰의 모진 고문에 제발 목숨만 살려달라고 빌면서 비굴하게 서로 모해하다가 총살당했으며, 젊은 한 목사는 평소 존경하던 선배 목사들의 비굴한 행동에 충격을 받아 정신 이상자가 되는 바람에 살려 주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단 한 사람 신 목사만이 당당하게 신앙으로 처신하였기에 그의 용기와 기백에 감탄하여 그만은 살려 주었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된 것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신 목사 자신은 끝까지 입을 열지 않고 여전히 침묵을 지킨다. 이유는 사실대로 밝혀지면 ‘우리 교회 목사님은 공신당의 총부리 앞에서도 끝까지 믿음을 지키다가 순교하셨으니 우리도 그 신앙을 본 받자’면서 매일 같이 예배당에 모여 기도하는 성도들이 받을 충격이 너무 클 것은 물론, 실망한 양떼들이 흩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죽은 열두 사람을 순교자로 추앙 받게 하고, 살아남은 신 목사 자신은 믿음의 변절자로 억울한 누명을 쓴 채 고통 속에서 살아간다는 줄거리다.
목사의 아들이기도한 작가 김은국은 전쟁이라는 이데올로기 싸움에서 군중에게는 진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이를 위해 거짓도 진실이 되어야 한다는 타락한 현실에 대해 냉소적인 비판을 정 대령의 처신을 통해 쏟아내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작가 김은국은 이 작품을 통해 12명의 목사가 죽음 앞에서 기도하며 처연히 하나님 앞으로 가는 길이라 여기며 일사각오의 신앙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신앙을 버리는 모래성과 같은 현상을 개탄하면서 사실(fact)의 진실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Love)의 진실을 끝까지 구현해 낸 신 목사와 같은 진정한 순교자적 신앙을 가졌는가, 독자에게 묻고 있는 것이다. 광복 76주년을 맞은 우리는 주기철 목사, 소설 속의 신 목사를 깊이 생각하고 기억하고 싶다. 세상이 가지지 못한 교회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성, “죄를 씻어 정결케 하는 공동체”로서 그 영광을 드러내야 할 사명자요 증인이 목사일진대, 이 정체성은 빛바랬고, 신비로운 맛은 왜 사라졌느냐고 끝없이 질문을 던지는 작가의 음성이 이 순간도 들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