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열 목사 (본지주필, 기독교한국신문논설위원 군남반석교회담임목사) |
|
요즈음은 사람들의 생각이 어지간한 일들은 관심이 없다. 현대인들의 병중에 하나는 큰 것만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Super, Mammoth, Giant, Big, Great 등의 용어를 너무 좋아한다. 큰 것들 때문에 작은 것들은 발붙일 자리가 없게 되었고 작은 것은 염두에 두지도 않고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작은 것이 소중하고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성경에서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두고 길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찾기 위해서 목자는 산과 들, 바다를 건너 생명까지 아끼지 아니하였다. 99마리가 아니라 길 잃은 한 마리의 양이 중요하다. 성경에는 10개의 드라크마 중 한 개를 잃어 버렸을 때 온 집안을 다 뒤져서 찾아냈다고 한다.
집에 있는 아들보다 집을 떠난 탕자에 더 관심을 기울이는 아버지가 주님이시다. 건강한 자보다 병든 자에게, 의인보다 죄인을 회개 시키려 오신분이 주님이 아닌가?
자칫하면 우리는 생명의 근원이 되는 지극히 작은 것에 무관심하기 쉽다. 그러나 지극히 작은 일에 충성하는 자가 큰일에도 충성한다고 성경은 말한다.
교회도 예외는 아니다. 교회는 예수님께 속해있고 교인은 목양의 대상이다. 목회자가 교인을 사랑하고 있는지를 알려면 설교를 들어보면 알 수가 있다. 만약에 목사가 설교하면서 교인을 때리고 있다면 비록 설교를 듣고 있어도 설교자의 교인이 아니다. 여기에서 때린다는 표현은 교인들이 육신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피하도록 하는 뼈와 골수를 찔러 쪼개는 말씀의 예리함과는 확실히 구별되는 말이다. 교인들을 탓하고 책망하고 미워한다는 의미로써 때린다는 것을 말한다.
예수님께서는 ‘내 어린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셨다. 어린양은 풀을 먹지 못한다. 사료를 먹을 수도 없다. 어미양의 젖을 먹어야 한다. 어미의 젖을 먹는다는 것은 어미의 피를 먹는다는 의미다. 어린아이도 어머니의 젖을 먹고 자란다. 그러나 이것은 그냥 어머니의 가슴에서 젖을 먹는 것이 아니다. 사실은 어머니를 먹고 자라나는 것이 아닌가? 목사의 행복은 교인들에게 자기존재의 전부를 내어줄 때 하늘에서 주는 행복을 맛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어머니의 마음으로 목회를 한다면 한국교회가 획기적인 변화가 오지 않을까?
김남조 선생은 그의 저서에서 ‘너를 위하여 나 살거니 소중한 것 무엇이나 너에게 주마 이미 준 것은 잊어버리고 못 다준 사랑만을 기억하리라’고 했다. 작은 것에 관심을 갖자.
파스칼의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약간 낮았더라면 세계의 역사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라는 말은 많은 교훈을 준다. 하찮은 일 지극히 작은 것 하나가 세계를 바꿀 수 있다. 성경은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사망이 그 한사람으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였은즉… 한분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 하리로다(로마서 5장 17절)”고 말씀한다.
옛날 일본 큐슈지방에서 탄광이 폭발하여 400명이 죽었고 기차가 충돌하여 200명의 사망자가 생겼다. 사고의 원인은 탄광석탄을 실어 나르는 차를 연결하는 못이 하나 빠졌고, 기차는 바퀴의 못 하나가 빠졌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한 개인의 가치를 대형, 맘모스, 자이언트라는 큰 물결 속에 휩쓸어 넣는 생명 경시하는 것을 재인식하여 지극히 작은 일도 소중하게 여겨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