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의 기쁨이 가시기도 전에 조국이 분단되어 아직도 통일을 이루지 못한 채 해방 76주년이 되었습니다. 무관중 경기로 우여곡절 끝에 치러진 도쿄올림픽도 폐막되었습니다.
∎ 손기정과 김교신 선생
김교신 선생님의 생애와 사상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그 분에게 영향을 미쳤던 한국 개신교의 역사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최초의 한국 선교사 알렌이 제물포에 첫발을 내딛은 것은 1884년이었고, 이어 언더우드와 아펜절러가 각각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이들 선교사가 복음을 전하기도 전에 이미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이 한국어로 번역되어 있었고, 압록강 근처 만주의 집안 부근 그리고 서북 지방에는 이미 세례 받은 신도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언더우드는 조선에 복음의 씨를 뿌리고자 왔는데, 생각지도 않게 추수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감격해 했던 것입니다. 이 신도들은 1885년에 황해도 장연에 ‘솔래교회’를 세웠는데, 이것이 한국 최초의 개신교회가 되었습니다. ‘솔래교회’는 언더우드가 1887년 9월에 세운 새문안교회보다도, 아펜젤러가 세운 1887년 10월의 정동 제일교회보다도 무려 1년 반이나 앞서 세워졌던 것입니다. 이렇게 이름 없는 성도(신도)들에 의해서 시작된 한국 개신교의 기초를 다진 사람들은 도산 안창호, 남강 이승훈, 고당 조만식 등이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목사가 아닌 성도(신도)들이었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한국 개신교는 위대한 신도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또한 이어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이름 없는 성도들에 의해 지탱되고 일구어지는 교회라는 위대한 전통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위대한 신도중에서도 남강 이승훈 선생님은 김교신 선생님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오산 학교에서 배운 남강 선생님의 제자인 함석헌 선생님이 김교신 선생님과 형제 이상의 막역한 신앙적 동지였기 때문에 김교신 선생님 역시 남강 선생님을 깊이 존경하고 흠모했던 것입니다. 김교신 선생은 일본에서 대학을 졸업한 후 서울 양정중학교에 지리 선생님으로 부임하였습니다. 선생은 수업시간마다 지리과목은 절반만 가르치고, 남은 시간은 학생들에게 민족혼을 깨우치는 정성을 쏟았습니다. 선생이 담임을 맡게 되자 자기 반 학생들의 이름을 수첩에 적고는 날마다 아침 기도 시간에 한 명 한 명의 이름을 부르며 중보 기도하였습니다. 선생은 학생 한 명 한 명에 대하여 관심을 기울여 인격적으로 대하며 지도하였습니다. 학생 중에 손기정이란 이름의 학생이 있었습니다. 그가 달리기에 소질이 있음을 알고 마라톤에 도전하기를 권하였습니다. 마라톤을 하여 조국을 빛내고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기를 권하였습니다. 손기정군은 담임선생의 권면을 듣고 힘을 얻어 마라톤에 도전하였습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을 앞두고 일본 전체에서 파견할 선수를 선발하기 위하여 1935년 11월에 동경명치신궁 마라톤대회가 열렸습니다. 손기정군은 이 대회에 조선대표 선수로 참가하였습니다. 42Km에 이르는 마라톤 구간을 달리는 중에 삼분의 이쯤 되는 위치에 이르러 손기정군은 기운이 진하여 쓰러질듯 하며 비틀거렸습니다. 이때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제자를 격려하기 위하여 자전거로 뒤따르던 담임선생 김교신이 소리를 높여 외쳤습니다. "기정아, 기정아, 조국을 생각해라, 예수님을 생각해라." 쓰러질듯 하던 손기정군이 담임선생의 이 말이 귀에 들리는 순간 이를 악물며 다짐케 되었습니다. "그래, 달리다 죽을 각오로 달리자. 조국을 위하여, 예수님을 위하여 달리다 죽을 각오로 달리자!!" 이렇게 손기정군은 죽을 각오로 달리고 달렸더니 금메달을 따게 되었습니다. 이에 조선과 일본 전체에서 일등을 하게 된 손기정군은 다음 해 베를린 올림픽 대회에 참가하여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마라톤으로 조국을 빛낸 손기정 선수는 익히 알고 있으나, 그의 뒤에서 그를 위해 헌신하며 지도하였던 김교신 선생은 잊고 있습니다. 선생의 그런 지도는 평소에 예수 그리스도를 닮으려 노력한 경건의 훈련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성서한국의 기초를 닦는 일에는 크리스천들의 선생과 같은 진실과 헌신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김교신 선생은 함경남도 함흥에서 1901년에 출생, 1945년 4월 25일에 사망한 기독교인이며, 애국자, 교육가였습니다. 일제강점의 민족적 수난기에 종교적 구제와 사회적 구제의 더 높은 차원에서의 결합을 보여주는 실천적 차원의 구제신앙을 추구하였습니다. 선생은 엄격한 유교적 가풍 속에서 한학을 수학, 함흥보통학교를 거쳐 1919년 함흥농업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그 해 3월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세이소쿠 영어 학교에 입학했고, 1920년 4월 동양선교회 성서학원 학생의 노방전도를 통해서 처음으로 크리스도교를 접했습니다. 노방전도에 깊게 감명 받아 4월 18일부터 도쿄 우시고메 구에 있는 성결교회에 출석, 6월에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11월 교회내분에 깊은 충격을 받고 6개월 동안 교회출석을 끊고 방황하다가, 일본 무교회 운동을 창시한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를 만나면서 체계적인 크리스도교 신앙에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 뒤 약 7년간 우치무라가 주도한 '성서연구회'의 일원으로 신앙적 토대를 형성시켜갔습니다. 그는 우치무라를 크리스트교 신자인 동시에 일본 제국주의에 반대하고 일본 크리스트교의 자주성을 주장한 일본의 진정한 애국자로서 이해하면서, '진정한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는 것이 조국 조선을 구하는 일'이라는 신념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당시 '성서연구회'에는 함석헌·송두용(宋斗用)·정상훈(鄭相勳)·양인성(梁仁性)·유석동(柳錫東) 등 조선인 유학생이 있었습니다. 이들과 더불어 '조선성서연구회'를 조직, 성서를 우리말로 번역하는 등 체계적인 성서연구에 몰두했습니다. 1921년 세이소쿠 영어학교를 졸업하고, 1922년 도쿄 고등사범학교 영어과에 입학했고, 이듬해 지리박물과로 옮겨 1927년 3월 졸업했다. 1927년 4월 귀국하여 고향인 함흥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 교편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다음해 양정고등보통학교로 옮겨 이후 1940년까지 12년 간 재직을 하다가 복음전도에 전념하기 위해 사직했습니다. 1940년 9월부터 경기중학교에서 다시 교편을 잡았으나, 불온한 인물로 주목받다가 6개월 만에 추방되었습니다. 또 1941년 개성에 있는 송도고등보통학교에 부임했지만, 1942년 3월 '성서조선사건'으로 15년에 걸친 교사생활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습니다. 그는 박물학을 가리키면서 학생들에게 독립정신·민족혼을 불러일으키는 민족주의적 교육을 일관했습니다. 교사활동 이상으로 천직으로 생각하고 혼신의 힘을 쏟았던 것이〈성서조선〉이라는 월간 종교잡지 발행과 성서연구집회를 가지는 것이었습니다.〈성서조선〉은 함석헌·송두용·양인성·유석동 등 우치무라 문하생들의 동인지로서 창간되었습니다. 제16호까지 편집책임자는 정상훈이었지만, 1930년 5월 제17호부터는 김교신이 주필이 되어 1942년 3월 제158호까지 발간했습니다.〈성서조선 발행과 표리일체를 이루었던 활동은 일요일마다 열린 성서연구회였습니다. 이것은 1930년 6월부터 주로 가정집회 형식으로 약 10년간 계속되었습니다. 성서연구회와 동시에 1932년 이후 매년 연말연시에 1주일 간 전국 각지의 신앙 동지 및 〈성서조선〉 독자들이 함께 모이는 동계성서집회를 약 10년 동안 계속했습니다. 성서연구회 및 성서집회에서 행한 연구 및 강의·강연은〈성서조선>에 게재되었습니다. 그는 참된 크리스도교를 천명하고 성서에 의하여 새롭게 거듭나는 인간을 만들어내, 조선의 참된 독립을 추구하는 것을 이러한 종교활동·집회의 궁극적인 목표로 확신했습니다.〈성서조선〉은 일제로부터 불온한 책으로 지목되어오다가, 1942년 3월호 권두언의〈조와 弔蛙>가 조선민족의 순수한 영혼을 찬양했다는 이유로 폐간처분을 당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함석헌·송두용·유달영·김교신 등 13명이 투옥되어 1년 옥고를 치렀습니다. 1943년 3월 김교신은 불기소처분을 받아 출옥한 후 1년간 각지를 순회하면서 전도했습니다. 그러다가 1944년 질소비료공장회사에 현지징용 형식으로 입사하여 조선인 노무자의 복리후생을 위하여 교육·의료·주택·대우 등을 개선하는 일에 주력했습니다. 그는 끝까지 창씨개명·신사참배를 거부하고 강제 징용된 동포들에게 크리스트교의 참된 신앙정신과 독립정신을 계몽하다가 발진티푸스에 감염되어 아쉽게도 조국해방을 보지 못하고 1945년 4월 25일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