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재 목사
(전,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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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이나 가문은 물론 어느 국가 어느 민족에게나 부끄러운 치욕의 흑역사가 있기 마련이다. 우리도 그리스도인으로서 부끄러운 치욕의 흑역사일수록 ‘기억’해야 한다. ‘기억하다’(Remember)란 “과거의 그 역사(History)를 현재의 역사 선상에 접목시켜 뼈저리게 기억하게 하여 새롭고 건강한 역사를 창조해 나아가는 의지의 결단”을 말하기 때문이다. 일본군국주의에 철저하게 유린당한 우리 민족의 종교적 흑역사를 오늘에 되살려 어떠한 형국(荊局)에서도 본질과 정체성(Identity)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교훈으로 삼아야 하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 천주교, 불교, 기독교의 기억조차 하기 싫은 흑역사를 더듬어 교훈을 얻고자 한다.
하나, 로마가톨릭교회의 배도. 1919년 3월 1일, 기미독립운동의 민족 대표 33인 중에 천주교는 한 명의 민족 대표도 포함되지 않았다. 그 절통한 비사(秘史)를 아는가? 천주교 교리에는 7성사 중 하나가 고해성사(告解聖事)이다. 인간은 어떤 존재도 인간의 죄를 용서할 사죄권이 없음에도 로마가톨릭교회는 기상천외한 교리를 만들어 수많은 신자들이 신부(神父)가 자기들의 죄를 사해 줄 권세가 있다고 믿으면서 고해소 앞에 줄을 선다. 고해를 받은 사제는 고해자의 죄에 대하여 철저히 비밀로 하는 것이 고해성사의 생명이다. 그러나 간혹 비밀이 유출되어 신도들이 많은 곤경에 처해지는 불상사가 엄청난 후폭풍을 몰고 오는 경우가 종종 있다.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 후 천주교 신부의 밀고 사건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로마가톨릭교회 신자였던 안중근 의사의 사촌 동생 안명근(영세명: 안 야고보)이 1911년 1월 평양 성당에서 빌렘(Nicolas Joseph Marie Willhelm, 1860-1936) 신부에게 고해한 내용을 천주교조선교구장이었던 프랑스인 뮈텔 주교 앞으로 보낸 편지가 밀고의 빌미가 된 사건이다. 안명근이 안중근과 함께 중국 하얼빈에서 일본 총리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 저격 사건에 적극 가담했다는 사실을 빌렘 신부에게 고해한 내용을 빌렘이 당시 조선천주교의 결정권자요 교황의 대리자인 뮈텔 주교에게 보낸 편지를 받는 즉시 ‘눈길을 헤치고’ 조선총독부 경무총감 겸 조선헌병사령관 아끼이시 모토지로(明石元二郞)를 찾아가 밀고했던 충격적인 사건이다. 일본 육군장관 출신인 초대 총독 데라우치는 철저한 일본군국주의 정신으로 무장된 냉혈한으로서 조선 통치를 위해 경찰과 헌병을 총괄하는 아끼이시(明石)를 앞세워 강권통치 체제를 갖춘 터였다. 그 밀고 사건은 1911년 1월 11일에 있었던 일이였다. 왜 그래야만 했을까? 당시 종현성당(지금의 명동성당)은 부지 문제로 소송에 걸려 1심, 2심에서 패소한 상태였다. 일본인들이 성당 일부 부지를 침범함으로써 진고개를 넘어가는 길이 막혀 있어 해결할 방도가 없던 터에 일본 총독부 경무총감에게 독립운동의 비밀을 넘긴 대가로 천주교 성당은 부지 문제를 즉각 해결했을 뿐만 아니라 현재 넓게 보이는 광장과 대로를 건설해 주는 특혜를 받은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명동 성당 앞을 지나갈 때면, 마치 그 곳이 정치적 민주 성지인 냥 바라보지만, 그때 애국지사를 밀고한 대가로 얻어낸 결과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뮈텔의 밀고는 ‘데라우치 총독 암살 미수사건’으로 조작되어 조선총독부가 민족해방운동을 탄압하기 위하여 105인의 독립운동가를 고문, 투옥시킨 105인 사건으로 기독교계를 중심으로 조직되었던 애국계몽운동가의 비밀결사였던 신민회가 해체되는 원인이 되었다. 안명근은 종신형을 언도 받아 수형 생활을 하는 중 빌렘 신부가 감옥으로 면회까지 하는 야비한 행동도 서슴지 않았으나 안명근은 그들의 추한 짓을 전혀 몰랐다. 15년 간 옥고를 치루고 1924년 출옥한 안명근 의사는 고문 후유증으로 1927년 중국 길림에서 40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프랑스 사람 뮈텔 주교는 조선 천주교 우두머리로서(1890-1933 사망 때까지 재임) 일제의 침탈을 수수방관하는 데서 완전히 선을 넘어 일제 통치에 적극 도울 뿐더러 일본이 요구하는 모든 종교 행위까지 수용하여 전국 성당 미사에 접목시켰다. 천주교신학교 재학생들 중 뮈텔 주교의 이중성에 항의하는 학생들은 가차 없이 제적시키기까지 한 인물이다. 이처럼 식민지 초기 조선인의 항일 의지의 싹을 자르려던 일제에 뮈텔 주교의 밀고는 독립운동을 탄압하기에 더 없이 좋은 빌미가 된 것이다. 한국 천주교의 이와 같은 조류는 5.16 군사 쿠데타까지 이어졌다. 한국 천주교는 민족과 역사 앞에 씻을 수 없는 반민족 행위를 진정 참회해야 할 무거운 부채를 짊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둘, 총칼에 유린당한 불교, 그리고 저항 정신
1937년 9월 조선의 기독교가 일본의 신도주의(神道) 우상 앞에 무릎을 꿇게 한 조선 총독 미나미 지로(南次郎)의 교활한 종교 탄압의 칼끝은 그 해 11월에는 불교계로 향하였다. 미나미는 조선불교대표주지회의를 총독부 대회의실로 소집하였다. 일찍이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内正毅, 1852-1919) 육군 대장이 조선총독부 초대 총독으로 재임 중 자기 스스로 독실한 불교 신자임을 자랑하면서도 정책은 그와 정반대로 불교를 총독부 손아귀에 넣는 사찰령(寺刹令)을 제정 공포함으로써 권력 앞에 종교를 종속시킨 인물이었다. 뿐만 아니라 데라우치는 일본 사찰의 승려처럼 조선의 승려들도 결혼을 하도록 장려했고, 농지 수입의 이권을 완화시켜주고 일반 중생들보다 풍요롭게 살게 함으로써 불교 계율이 무너지도록 퇴폐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했다. 이를 간파한 총독 미나미(南)는 전국불교승단대표들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을 던졌다. “조선 불교 발전에 공이 컸던 데라우치 각하는 죽은 후에 어디로 갔을까요?” 총독부 건물의 위엄과 미나미의 위압적인 언행에 승려들을 얼어붙게 만든 분위기에서 튀어나온 대답은 “데라우치 총독은 극락 밖에 가실 곳이 없습니다”라는 아첨의 합창이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홀로 침묵만 지키고 있던 한 노승을 비범한 인물로 보고 있던 총독이 똑같은 질문을 그에게 던지자 회의실의 높은 천정까지 울리는 벽력같은 목소리의 대답인 즉 “불법(佛法)에 의하면 비구승 한 사람을 파계시켜도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떨어진다 하였거늘, 데라우치 총독은 비구승 수천을 파계시켰으니 무간지옥밖에 갈 데가 없소. 그러니 여기 모인 주지들은 하루 빨리 성도(成道)하여, 무간지옥에서 고통을 겪고 있는 데라우치 총독을 구제하여야 하지 않겠소?”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회의실은 삽시간에 격랑을 만난 조각배와도 같은 분위기로 돌변했다. 그 자리에 임석한 총독부 요직과 아첨 밖에 모르던 주지들의 얼굴에는 낭패와 겁에 질린 얼굴들로 뒤범벅이 되었다. 심지어 약삭빠른 주지 한 사람은 그 노승을 미친 사람이니 하나도 들을 것이 없다고 소리쳤고, 모든 주지들 역시 위기를 모면하려고 노승에게 독설을 퍼부었으나, 이미 생과 사의 경계를 달관한 그 노승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석불처럼 조용하고 의연하게 앉아 있었다. 그가 바로 송만공사(宋滿空師)이다. 통역을 통해 만공사의 불호령의 내용을 듣게 된 총독은 체포하려는 관헌들을 도리어 말렸고, 그 노승은 고고하게 본연의 길을 걸어 나갔다. 그 대신 총독부가 성취한 것은 법회 때마다 앞서 행하는 일본 종교의식과 신사참배, 그리고 집집마다 신단(神壇)을 설치하고 ‘묵도’하는 일본화 정책의 실행이었다.
셋, 고멜과 같은 한국 장로교회, 부끄러움조차 잃어버린 민낯
조선 기독교의 신사참배와 동방요배는 친일의 전초에 불과했다고나 할까. 신사참배 가결 후 장로교회는 1938년부터 3년 간 국방성금 158만원, 병사위로금 17만2천원, 기관총구입비 15만317원5십 전을 거두어 조선총독부에 바쳤다. 당시 쌀 한 가마니가 20원이었으니까 장로교회가 총독부에 바친 국방성금 158만원은 오늘의 화폐 가치로 6백억 원에 달하는 거액이었다. 일본해군성에서는 그 성금으로 구입한 비행기에 ‘조선장로호’라 명명했고, 1942년 9월 28일 경성운동장에 8십 여 명의 장로교회 대표들을 초청해 감사장과 수납서 및 비행기와 기관총 사진 전달식을 가졌다. 일본육군성에서도 그 해 11월 17일 용산기지 연병장에서 경기도 내 장로교회가 헌납한 비행기 55대의 명명식을 갖고 ‘조선장로호’라는 명칭을 부여했다. 장로교회는 성금을 갖다 바친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장로교회는 무운장구기도회 8,953회, 일본찬양시국강연회 1,355회, 전승축하회 604회, 군부대 위문 183회 등 대대적인 행사는 물론 미국과 싸워서 이겨 달라는 일본식 신도의식(神道儀式)도 거행하였으니 그야말로 일본제국주의의 우상숭배가 친일뿐만 아니라 일본의 전쟁 승리를 염원하는 고멜과 같은 영적 창녀로 타락한 조선 장로교회의 민낯이었다.
뒤틀린 한국 종교의 근현대사가 아직 정리되지 않은 증거는 현재 한국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한국 정치의 병폐인 극단적인 이념 대결과 진영 논리로 파열되고 있는 원인(遠因)은 일제 청산이 되지 않고 그대로 승계시킨 미군정(美軍政)과 초대 정부가 무시한 역사의 아이러니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하겠다. 참된 광복의 회복과 극복은 과연 요원한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