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재 목사
(전,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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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예배 선언은 한국 대부분의 교회들이 예배, 또는 경건회를 개회할 때, 인도하는 이가 사용하는 말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묵도(黙禱)’라는 용어가 과연 기독교 예배에서 사용되는 것이 신학적으로 옳은가 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다는 데 문제는 심각하다. 신학 교육을 받고 일정한 과정을 거쳐 목사가 된 자도 실천신학 과목 중 「예배학」을 배웠음에도 예외는 아니다. 모두가 ‘묵상기도’ 쯤으로 생각하고,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의식(儀式)으로 개념 없이 그렇게 선언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본질상 예배는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는 하나님의 일(opus Dei)이다.’(존 맥아더). 그러므로 하나님 계시로 부르심에(성경, 성례)에 대한 인간의 응답(기도, 찬송, 헌신)의 순환주기가 곧 예배의 순서이다. 따라서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영원토록 하나님을 예배하고 즐거워함으로써 그분을 영화롭게 하는 일인 것이다. 예수님의 지상명령(至上命令)인 복음 전도의 종착점도 온 열방이 하나님의 주권에 순종하며 예배하는 데 있는 것이다. 그러함에도 ‘묵도함으로 예배를 시작한다’는, 마치 인간이 기도로 신을 부른다는 전통 무속 신앙과 같은 해괴한 선언은 어디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을까?
이것 역시 일본군국주의의 잔재이다. 일본군국주의자들이 우리 조국을 찬탈하고 중국 대륙침략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기 시작했던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많은 젊은이들과 종군에 필요한 인력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이 내선일체(內鮮一体), 즉 ‘일본과 조선은 한 몸이다’라는 미명 하에 조선인의 일본인화(日本人化)를 표방하며 조선인의 말살정책을 단행하게 된다.
그 장본인이 제 7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한 일본국 육군 대장 미나미 지로(南次郎, 1874-1955)이다. 일본국의 육군대신과 만주국 총사령관을 거쳐 조선총독으로 부임한 미나미는 1936년 8월부터 1942년 5월까지 약 6년 간 조선 총독으로 재임하면서 악명을 떨쳤는바, 그의 부임 제일성은 ‘조선인 전쟁 총동원론’이었다. 그의 선언은 부임 즉시 한반도를 제도적으로 전시동원체제로 개편 가동하였다. 그리고 미나미는 조선인의 일본인화(日本人化) 정책을 본격적으로 구체화하여 1)일본어 상용(조선어 및 한글 사용 엄금), 2)일본식 이름 강요(창씨 개명), 3)일본식 호적제도 도입, 4)각종 학교에서 조선역사, 지리, 도덕 과목을 조선총독부 발행 교과서로 대체, 5)일본군 임시지원병제도 시행 등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조선인의 물리적 일본인화 정책이었다면, 총독 미나미는 일본 고유의 민간 종교 신토(神道, Shintoism)를 도입하여 전조선인들의 정신문화 말살 정책을 강요하기에 이른다. ‘신사’(神社)는 일본 신화에 등장하는 태양신으로, 일본 천황의 조상신인 천조대신(天照大神, 아마테라스오미카미)을 모신 건물을 말한다. 일본인에게 있어서는 현재도 국가의 최고 신으로서 조정의 엄숙한 제사를 받으며, 일본의 8백만 신을 지배하는 여신으로 숭앙되고 있다. 이는 곧 일본 천황 이데올로기를 식민 통치의 근간으로 삼기 위한 일본군국주의자들의 모사였다. 그리하여 조선 총독부 헌법으로 “모든 종교는 최고의 신(神)인 천황 아래서만 활동할 수 있다”고 명시하고 「신사 참배」를 강요하기에 이르렀다. 1910년 우리 대한제국의 국권을 찬탈한 일본은 부산 용두산을 필두로 전국 시, 군, 읍, 면에 신사를 세우는 한편, 서울 남산에 조선신궁, 평양에 평양신궁이라는 상징적인 거대한 신사를 세웠을 뿐만 아니라 초, 중등학교에는 봉안전(奉安殿)을 만들어 신사 참배와 동방요배(東方遙拜, 동쪽 도쿄의 일왕을 향해 90도로 허리를 숙여 절하기)를 관공서를 비롯한 학생들에게 강요하였다.
여기서 통탄할 것은 조선인은 황국신민(皇國臣民)으로서 ‘모든 종교는 천황 아래서만 활동할 수 있다’는 헌법 정신을 준수시킨다 하여 첫째, 종교의식을 행할 시 먼저 신토 의식(神道儀式)인 ‘묵도’(黙禱, 모쿠토)로 시작 할 것과, 둘째, 모든 종교인은「신사 참배」의 의무를 행할 것을 강요받게 된 것이다. 천주교, 불교를 비롯한 안식일교, 감리교, 성결교, 침례교는 일찍 수용했으나, 장로교는 평양을 중심으로 끝까지 우상숭배라고 반대하며 많은 고초를 겪은 가운데 총독부의 회유로 목사들 일부가 신사 참배는 종교 의식이 아니라 국민의례라는 궤변을 주장함으로써 신사 참배는 찬·반 양론으로 갈등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1938년 당시 미북장로교회와 남장로교회 선교부가 세운 학교들을 일본 신토(神道)의 모든 의식과 신사 참배를 거부하다가 폐교 당하거나 자진 폐교하는 사태가 속출했다. 평양숭실전문학교는 신사 참배 반대로 폐쇄 당했고, 평양장로회신학교는 무기 휴교에 들어갔던 것이 좋은 예다.
일본 경찰은 강하게 반발하던 주기철, 이기선, 김선두 목사 등을 사전에 예비 검속을 시키고 신사 참배에 협조적인 홍택기, 김길창, 박용률, 박임현, 길인섭 목사 등을 선동하여 1938년 9월 9일, 평양 서문밖교회 예배당에서 열린 제27회 장로교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하게 하였다. 한부선을 비롯한 30여명의 외국인 선교사들이 불신앙 결의에 강력하게 항의하여 총회 장소로 몰려갔으나 일본무술경찰에 의해 끌려 나갔다. 당시 일본 관헌은 경찰을 동원하여 예배당 외각을 봉쇄하는 한편, 97명의 경찰들이 회의장 강단 위와 193명의 총대들 사이사이에 앉아 신사 참배를 강제로 결의하게 하였던 것이다. 총회장에 홍택기 목사, 부총회장 김길창 목사가 피선되었는데, 총회장 홍 목사는 “신토(神道)는 종교가 아니며 기독교교리에도 어긋나지 않는 애국적 국가 의식이기에 솔선에서 국민정신 총동원에 적극 참가하여 황국신민으로서 정성은 다해 달라”는 취지의 선언문을 채택하였는바, 이는 사탄에게 굴복하는 치욕의 날로 기록되었다. 그리하여 총회 다음 날은 총회를 정회하고 김길창, 박용률 목사가 노회장단을 인솔하고 평양신궁을 참배함으로써 한국 교회는 급격히 변질되고 말았다.
참고적으로 문민정부 시대에 김영삼 전 대통령은 조선5백년 역사의 터 앞 광화문에 자리 잡고 있던 총독부 청사를 과감히 헐고 경복궁을 복원한 일과 창경궁과 경희궁을 옛 모습으로 되살렸을 뿐만 아니라, 「국민학교」를 「초등학교」로 개칭한 것은 그 분의 신앙적 양심의 발로가 아닌가 생각된다. 「국민학교」는 「황국신민학교」(皇國臣民學校, 일황 아래 존재하는 백성)의 약자라는 점을 인식해 보라. 그래서 예배 시 행하는 묵도의식, 동방요배, 신사참배 등 교단의 결의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거부하고 신앙의 절개를 지킨 숭고한 인물들이 어느 교파 교회에나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평남의 주기철, 평북의 이기선, 경남의 한상동, 주남선, 전남의 손양원, 함남의 이계실 목사 등 전국 각지에 분포되어 있었으며, 만주 지역에서도 박의흠, 김형락, 김윤섭 등이 신사 참배 결사 반대운동을 펼쳤다. 악랄했던 일제의 총칼에 의해 주기철, 조용학, 최봉석, 최상민, 김윤섭, 박의흠 등의 순교자가 나오기까지 한 비통한 근대사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상과 같은 역사 선상에서 ‘묵도’(모쿠토)의 이방신에게 절하는 우상숭배의 반기독교 용어를 광복 76주년이 되는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는 한국 교회 현상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되어야 할까?
뿐이랴. 조국이 해방이 되고 광복의 기틀을 세우기 위해서「반민족특별조사위원회」가 조직되고, 기독교 목사 가운데 친일분자로 전필순, 정춘수, 김인선, 양주삼, 정인과, 김길창 제씨가 체포되었지만, 대부분 모윤숙 시인과 같은 전철을 밟으면서 그 후손들은 반공투사 가정으로 건재한 기득권세력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상이다. 우리 교회는 확고한 정통신앙과 역사의식을 가져야만 이 미래를 향한 희망이 있다. 이래도 “묵도로 예배 시작합니다”라고 계속 사용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