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열 목사 (본지주필, 기독교한국신문논설위원 군남반석교회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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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솝우화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느 날 나귀가 등에 장작을 한 짐 지고 지나가다가 그만 앞발이 미끄러져서 넘어지고 말았다. 나귀는 짐이 너무 무거운데다 물에 빠지자 일어나지도 못한 채 신음하며 살려달라고 했다. 그때 물속에 있던 개구리들이 말하기를 ‘별 어리석은 놈도 다 보겠네! 물에 좀 빠졌다고 저렇게 소동을 부리다니 우리는 항상 물속에서 사는데… 만일 네가 이 물 속에서 산다고 한다면 무슨 소리를 할테냐?’고 물에 빠져 쩔쩔 매는 나귀를 꾸중했다. 개구리는 자기들이 물속에서 살기 때문에 나귀도 자기들처럼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너무나 일방적인 판단을 한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개구리처럼 자기 기준으로 남을 판단 할 때가 많다. 그러나 세상천지에 허물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어떤 사람이 바닷가에서 커다란 흑진주를 발견했다. 엄청나게 큰 값비싼 진주를 얻은 청년은 너무나 기쁘고 좋았다. 그러던 어느 날 진주에서 조그만 흠집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흠집을 닦았으나 그 흠집은 없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진주를 살짝 한 겹 깎아냈다. 그래도 흠집은 여전했다. 그대로 남아있는 흠집을 보고 계속해서 반복해가며 벗겨냈다. 그 결과 진주 흠집이 마침내 없어졌다. 그러나 그날 그 청년의 손에는 그 진주도 없어져버렸다. 흠집이 진주의 중심부분에 있었기 때문에 모두 깎여진 것이었다.
의인은 없다. 누구나 죄인이다. 우리가 남의 허물을 덮어주면 하나님도 우리의 허물을 덮어 주실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남을 비판하면 우리도 비판을 받을 것이다. 오늘날 이 사회는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다. 이럴 때 일수록 신앙의 질서를 가다듬고 험한 세상도 헤쳐서 나가는 믿음의 돛대를 올려야 한다. 믿음은 오직 예수의 십자가에 우리 자신을 함께 할 때만 참 믿음의 출발점이 된다.
인간은 누구에게나 고난과 고통이 있다. 아담과 하와의 고통은 에덴에서의 범죄로 인한 결과로 주어진 죄의 열매였다. 일찍이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내가 고통하는고로 내가 있다 (I struggle, therefore I am)'고 했다. 불교에서는 ‘사는 것이 고통이요 늙는 것, 병드는 것, 죽는 것,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것, 미워하는 사람과 만나는 것, 구해도 얻지 못하는 것, 끓어오르는 욕망이 고통을 준다’며 8고를 말하고 있다.
욥기서 5장 7절에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나니’ 라고 했다. 이 세상 누구에게나 빈부귀천의 차이 없이 고통은 다 갖고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문제는 고통과 고난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고난과 고통을 어떻게 이겨나가느냐, 고통을 어떻게 해서 삶의 유익한 것으로 만드느냐가 더 중요하다. 루터는 말하기를 ‘고통은 축복을 가져다주는 지름길’이라고 하였다. 축복은 고난의 보자기에 담아서 온다는 말도 있다. 시편기자는 ‘고난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라고 기록했다.
우리는 그러므로 고난이 있을 때 예수를 바라보자. 그 참혹한 십자가의 고통을 바라보자.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흠도 티도 없는 그 예수가 내 죄를 지고 갈보리 산상에서 손과 발에 못이 박혔다. 머리에는 가시 면류관을 씌우고 옆구리에는 창에 찔려서 물과 피를 다 흘리신 예수를 보자.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한 형벌이요 가장 참혹한 형벌이 아닌가? 십자가의 그 큰 고통을 예수는 왕관으로 바꾸셨다. 고난을 영광으로 바꾸었으며 죽음을 영생으로 바꾸신 예수를 보자.
지금도 어딘가에서 말 못하고 가슴 치며 죽을래야 죽을 수도 없는 고통스러운 일은 없는가? 밤마다 베겟 머리를 적셔가며 잠 못 이루고 몸부림치는 이는 없는가?
예수께 나가자! 예수가 십자가에서 피 흘린 그 보혈의 능력을 믿자!
온 세상에서 예수의 이름보다 더 큰 능력은 없다.
우리 모두 판단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십자가를 먼저 지는 사람이 되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