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재 목사
(전,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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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며칠 사이 정치계에서는 때 아닌 ‘장유유서(長幼有序)’라는 유교의 오륜 사상이 논쟁거리가 되었다. ‘어른과 어린이 사이에는 차례가 있다’는 공자(孔子)의 가르침이 1천오백여 년 동안 동양의 정신 문화를 지배하면서 서열과 계급을 중시해 오던 전통이 남녀 평등을 넘어 양성 평등(兩性平等)으로 무섭게 변화하는 21세기 한 낮에 장유유서가 잠깐이나마 왜 논쟁의 중심에 섰을까?
필자는 그 내막을 들여다보려 하는 것이 아니라 유교의 동양 사상보다 훨씬 강했던 유대의 전통을 깨뜨리시는 예수님의 교훈을 오늘에 되살리는 데 있다.
마태복음 19장13절로 15절을 표준 새 번역 성경으로 옮겨 보겠다.
“그 때에 사람들이 예수께 어린이들을 데리고 와서 손을 얹어서 기도하여 주시기를 바랐다. 그런데 제자들이 그들을 꾸짖었다.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어린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허락하고 막지 말아라. 하늘 나라는 이런 어린이들의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 주시고, 거기에서 떠나셨다.”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겸손한 사람이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큰 자라고 비유적으로 가르치신 18장과는 달리 본문에서는 어린이들이 먼저 등장한다.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감화를 받은 부모들이 자기 아이들을 예수님께 데려와서 머리에 손을 얹어 축복 기도를 해 달라고 부탁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아마 한 부모가 원하니까 여기저기서 모여들었으리라 짐작된다.
하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은 18장의 가르침을 깜빡 잊고 ‘아이들은 예수님의 하시는 일에 아무도움이 안 된다’고 , 오히려 방해물로 여기고 ‘어린이 제한구역’(No Kids Zon)을 만들고 싶어 했던 것 같다. 이 모습을 보신 예수님은 제자들과 전혀 달랐다. “하늘 나라는 이런 어린이들의 것이다”.
무슨 말인가? 하늘 나라는 어린이들처럼 사회적 서열이나 위상이 없는 자들의 것이라는 파격적인 말씀이다.
예수님은 유대의 전통 문화에 찌들은 기성 세대에게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창조 질서에 따른 성경적 신앙이나 삶을 전혀 찾아보지 못하는 반면에 오리려 어린이들에게서 하나님께서 그토록 바라시는 하늘 나라의 합당한 심성(心性))을 보셨던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어린 아이들이 예수님께 나오는 것을 금하지 못하게 하신 것은 당연한 것이었으며, 기꺼이 그들의 머리에 손을 얹고 안수하며 축복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과 사역에는 하늘 나라는 오로지 어린이에게만 속했다고 말하지 않고 있다는 점도 아울러 유념해야 한다.
그러므로 오늘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비롯한 유대인 성인 남성들에게 보이신 교훈의 핵심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나이와 성별을 가릴 것 없이 고귀한 인격체이므로 어린이나 여성들을 무가치하게 여기지 말라고 강하게 질책하며 거부하셨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기뻐하고 사랑하며 축복하셨다는 것이다.
지금 21세기 우리 시대에는 이 사건이 피부에 와 닿지 않은 쾌쾌묵은 시대착오적 교훈으로 느껴질지 모르지만, 예수님 시대에는 그야말로 전 사회적으로 파장을 일으키는 혁명적 선언이었다. 구약의 역사에서 유대교가 발생하여 예수님 시대까지가 2천년이다. 그 이전까지 하면 3천 년 넘게 성인 남성 독주 시대였다. 따라서 성인 남성이 아닌 여성과 미성년자는 인구에 포함시키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역행한 반성경적 처사였다는 것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하다 하겠다.
창세기 1장 27절을 보라,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으니,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표준새번역)
여기 ‘하나님의 형상’ ‘첼렘’(Xelem)은 겉모습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격’(Personality), '하나님의 대리자‘라는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남자와 여자는 생물학적 성(性,Sex)이라는 의미에다가 동등한 인격의 성(gender)의 의미를 강하게 나타낸다.
또 창세기 2장18절은 “주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남자가 혼자 있는 것은 좋지 않으니 그를 돕는 사람, 곧 그에게 알맞은 짝을 만들어 주셨다”.
여기 ‘돕는 사람’, ‘돕는 배필’을 히브리어 성경에는 에제르 케네구도(ezer Kenegdo)로 쓰고 있다. ‘에제르’는 ‘도움’. ‘케네구도’는 ‘마주 봄’이다. 풀어서 번역하자면 “서로 마주 보고 도움을 줌” 즉 보면서 서로 채워 주는 관계”가 부부의 본질임을 확실히 밝힌다. 남자도 하나님의 형상이고. 여자도 하나님의 형상이다. 동일한 인격, 동일한 대리자라는 사명적 문화명령을 받고 인간은 창조되었다.
그러함에도 2천 년 이상 성경을 계시로 받아 적고, 기록하고, 해석하는 모든 일을 남자가 했다. 수렵을 하고 생존을 맡아 가정을 보호하는 노동도 남자가 주도적으로 하여 왔다.
그 결과 자연스럽게 남성 중심으로 성경을 해석하게 되었고, “서로 마주 보고 도움을 주는” (채워주는) 관계에서 남성 주도의 가부장적 사회 문화를 형성하면서 ‘돕는 배필’로 번역하게 된 것이다.
유대인의 랍비, 성막과 성전의 대제사장과 제사장, 서기관, 회당의 회당장과 장로 등 종교, 사회 지배 계급 등 모두가 남성의 권력 욕구라는 본능이 지배하는 사회를 만들어진 것이다.
이와 같은 유대 문화가 2천 년 이상 유지되어 온 전통을 예수님께서는 깨뜨리시고 여성과 미성년자, 특히 어린이를 용납하시는 이 장면이야말로 경천동지할 혁명적 가르침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다면 예수님 이후 2천 년이 흐른 밀레니엄 시대인 오늘, 한국의 사회적, 교회적 문화는 어떠한가? “서로 마주 보고 도움을 주고 서로 채워가는” 인격을 중시하는 문화인가? 아니면 아직도 남성 위주의 가부장적 분위기가 여전한가?
유대교 못지않게 기독교 2천 년 역사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천주교 사제, 교회 목사, 신학자들은 남성들의 몫이었다. 일부 교단에서 여 목사, 여장로 제도가 생겼으나 아직 한국 교회에는 생경한 기독교 문화다.
그러나 한편, 18세기 유럽에서 일어난 페미니즘(Feminism)의 거센 물결은 한국 사회에도 ‘성의 전쟁’(gender war)이라 할 만큼 여성 해방운동, 여권 신장이라는 사회 변혁을 일으키고 있다.
페미니즘이란 한 마디로 ‘여성주의’다, 남녀 평등을 넘어 ‘양성 평등주의(兩性平等主義)’를 주창한다. 이 ‘이즘(ism)은 곧 사상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성경이 말씀하시는 바 근본 진리를 가르치시고 인간의 본질 회복을 삶으로 보여 주셨지, ‘이즘’ 곧 사상을 주장하지는 않으셨다.
“애들은 저리 가라, 어른들 말씀하고 계시는데 버릇없이 시끄럽게 하느냐? 아주머니들, 애들 데리고 가시오.”
이런 생각에 찌들어 있던 것이 당시 제자들이었고 오늘의 한국 사회다.
이에 반하여 “남자면 다입니까? 지금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그러십니까? 우리 여자들도 당당한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남녀가 평등한 세상입니다. 남자들은 우리들에게 성(Sex)이라는 생물학적 관점에서 어떤 생각(사상), 어떤 언어(조언), 어떤 행동(실천)들을 강요할 권리는 없어요. 그런 시대 착오적 생각일랑 버리세요. 여자가 언제까지 씨받이가 되어주고 살림하는 부엌대기로 살아야 합니까?”
바로 여성 해방, 양성 평등을 주도하는 페미니니티(Femininity)의 극단적 외침이다. 그렇다면 기독교적 인간학은 어떠해야 하는가? 분명한 것은 사람은 모두가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격체이다.
어떤 사람은 연합하고, 어떤 계층은 배제 당하는 그와 같은 반성경적인 차별을 없애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학이다.
이것이 오늘 성경 사건의 핵심이다. 이런 관점에서 필자는 절제 있는 기독교 문화가 사회를 정화시키는 사명을 정착시키리라 확신한다.
성령의 아홉 가지 맛 중에서 마지막이 ‘절제’라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이즘(ism)이나 운동(movement)은 항상 과욕으로 상식선을 넘어서는 위험성을 안고 있기 마련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삶에 적용시키는 지혜가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대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붙잡아야 할 교훈적 사명은 “나로 살아내고 너로 살려내는” 큰 그림 안에 함께 살아가는 균형 잡힌 세상을 만들어 가는 것, 이것이 인간이 맑은 눈으로 서로 보며 도움을 채워 주는 존재 이유요,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인간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