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꽃은 화사하게 피었을 때 가장 아름답지만 동백꽃은 땅에 꽃이 뚝뚝 떨어지고 난 뒤의 처연한 모습이 슬프도록 아름답게 다가온다. 동백의 빨간 꽃잎은 정말 <동백아가씨>의 노랫말처럼 그리움에 지쳐서 울다 지쳐서 빨갛게 멍이 든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일까. 동백꽃은 우리 민족의 수많은 수난사를 상징하는 꽃이 되었다. 수많은 이가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고도 73년 동안 해결되지 못한 채 가슴앓이를 해 온 여순사건도 그 중 하나다.
여순사건은 1948년 10월 19일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국방경비대 제14연대 소속 일부 군인들이 정부의 제주 4.3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고 일으킨 사건이다. 당시 군인들은 제주도 파병이 동족상잔의 비극을 낳을 뿐이라고 주장하며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이에 이승만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5개 연대를 투입해 진압하였는데 전남, 북, 경남 일부 지역에서의 충돌 과정에서 약 1만여 명의 무고한 민간인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이념과 권력의 다툼 사이에서 애꿎은 목숨이 스러진 것이다.
오랜 세월 여순사건 유족들은 다신 볼 수 없는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잘못한 것도 없이 숨죽이며 살아야 했던 서러움으로 가득한 통한의 세월을 보냈다. 유족들은 억울한 죽음을 바로 잡기 위해 이곳저곳 뛰어다니며 끊임없이 외쳤지만 이들의 한 맺힌 하소연은 반향 없는 메아리처럼 묻히기 일쑤였다. 그러는 동안 강요된 침묵과 기다림은 어느덧 일상처럼 굳어버렸다.
여순사건 유족들을 위한 특별법 제정 또한 아직이다. 20년 전에 열린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여순사건 특별법 제정을 권고한 이래로 16대 국회부터 계속 특별법을 발의해왔지만 4차례나 상임위 문턱을 넘지 못했다. 이러는 사이 얼마 남지 않은 고령의 유족 두 분이 재심 재판 진행 중에 돌아가셨다. 여순사건 진상규명과 피해자 명예회복을 위한 시간이 정말 얼마 남지 않은 것이다.
다행히도 조금씩 해결을 위한 좋은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있다. 올해 2월, 제주 4.3사건에 대한 추가진상조사와 희생자에 대한 위자료 지원기준 마련 등의 내용을 담은 4.3사건 특별법 전부개정이 이뤄졌다. 여순사건과 역사적인 궤를 같이 하는 4.3사건인 만큼 이번 개정은 얽혀 있던 여순사건을 풀어나갈 수 있는 실마리가 될 것으로 보인다.
또한 21대 국회에서 소병철 의원 등 152명의 의원이 재차 발의한 여순사건 특별법 제정을 위한 노력도 이어지고 있다. 법원은 여순사건 재심 판결을 통해 하루빨리 절차적 구제가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고, 지역 자치단체장들은 이를 위해 공동의 노력과 지혜를 모으기로 약속했다. 작년 여수 이순신광장에서 열린 72주년 여순사건 추념식에선 최초로 민․관․군․경이 함께 참석해 손을 맞잡았다.
김영록 전남도지사 역시 작년 하반기 특별법 발의 후 청와대, 여야 대표, 국무총리, 행안위 위원장, 행안부 장관 등 여야와 행정부를 넘나들며 법 제정을 위해 전방위로 노력하고 있다. 올해 2월에는 광주․전남 국회의원들의 입법 촉구 기자회견에 함께 하며 힘을 보탰다.
전남도의회의 여수․순천 10․19사건 특별위원회도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정책위 의장, 행안위 위원장 등 면담을 통해 입법 활동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이렇듯 분위기가 점점 무르익고 있는 만큼 이제는 결론을 내야 할 때다. 4월 법안 처리 무산에 대한 실망감은 접어두고 5월에는 반드시 처리될 수 있도록 다시 한 번 힘을 모아야 할 것이다.
제주 4.3사건에 불어온 따뜻한 봄바람이 5월에는 바다 건너 여기 남도에 닿기를 바란다. 제주 4.3사건 유족들의 가슴에 위로의 동백꽃을 활짝 피게 한 것처럼 여순사건 유족들의 가슴에도 예쁜 동백꽃을 피워내길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