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회자의 길로
저는 전남 신안에 있는 고이도라는 섬에서 태어났습니다. 그 당시 주민이 1천2백여 명이던 작은 섬이었는데 복음이 상당히 일찍 들어와 제 아버님이 어렸을 때도 이미 교회가 세워져 있었습니다. 마침 동네에 교회가 있어서 섬 생활이 무료하다 보니 친구 따라 주일학교에 가곤했지요. 중학교 때 목포로 유학을 나오면서 그나마 흉내 내던 신앙생활도 흐지부지되었습니다.
1974년에서 1975년으로 넘어가던 겨울,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에 돌아가 겨울 부흥회에 참석했었는데 이 부흥회에서 예수님을 구주로 확실히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20여 평 정도 되는 작은 예배당이었는데 전기가 들어오지 않으니 밤에는 촛불을 켜야 했어요. 촛불에 비취는 설교자의 모습이 신비로워 보였고, 그 분위기가 메시지에 더 몰입하게 했던 듯합니다. 그날 ‘나도 전도사님과 같은 목회자가 되었으면 좋겠다.’라는 결심을 했습니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곁길로 새지 않고 계속 이 목회자의 길만 걸었습니다. 1976년에 신학 공부를 시작하고 그 다음해에 안양북부교회에서 첫 교육전도사로 부임했으니, 그게 벌써 44년 되었네요.
▪ 교회를 개척해야겠다
강도사 인허를 받으면서 안양북부교회에서의 5년간의 부교역자 생활을 마치고 홍성에 있는 장척교회에 담임목회자로 부임했습니다. 성도가 스무 명 정도 되는 작은 시골교회였는데 저 역시 시골 출신이라 정서가 잘 맞았습니다. 일 년을 열심히 섬기니까 사십여 명으로 늘었습니다. 두 배가 되었으니 굉장한 부흥의 역사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하나둘 도시로 떠나기 시작하면서 교인 수는 다시 원점이 되었습니다. 목회자로서 낙심이 되었지요. 그러면서 도시에 개척을 해야겠다는 결심이 섰습니다.
하지만 목회를 고향인 신안이나 목포에서 할 생각은 없었기에 주로 수도권을 중심으로 그 일대에 개척지를 물색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 맹랑하지요. 가진 돈도 없고, 비빌 언덕도 없었는데 무작정 개척지만 물색하고 다녔던 것 같습니다. 장소가 좋아도 돈이 없어서 아무것도 못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아내가 처가인 목포에 갔다가 40여 평 되는 빈 공장건물을 소개받았습니다. 가보니 슬레이트로 지붕만 씌워 놓은 창고였지요. 이곳에서라도 교회를 개척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어서 1983년 5월 말에 내려와 6월 13일에 설립예배를 드렸습니다.
▪ 피로 세운 교회
결혼을 일찍 했기에, 목포에 다시 내려왔을 때 아이가 셋이었습니다. 설립예배를 월요일에 드리고 닷새가 지난 금요일 오후에 다섯 살이었던 큰아이가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개척하자마자 일어난 일이라 하나님을 향해 원망을 쏟아 부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나의 죄 때문에 이런 일이 생겼다고 생각할 주변의 시선 때문에 고통스러웠습니다. 아내는 목포에서 떠나자고 했지만, 여기서 물러서면 이후에도 또다시 상황이라는 파도에 질 것 같아서 끝까지 견뎌보자고 아내를 다독였습니다.
사고를 낸 버스회사에서 1천만원 보험금이 나왔습니다. 당시 돈이 없어서 예배당으로 사용하는 창고를 사글세로 연 80만원에 계약한 형편이었는데 갑자기 목돈이 생긴 것이었지요. 이 돈을 헌금으로 드리며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핏값으로 세워진 것을 믿습니다. 이제 아들의 핏값 1천만원을 드리니, 이것으로도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주세요.” 그리고 그 1천만원으로 73평 대지를 마련하고 그 다음해에 그곳에 40평짜리 예배당을 건축했습니다. 교회를 시작하고 20여명 정도 모였었는데 예배당을 건축하면서 지역을 이전하니 다시 원점이 되었습니다. 교회 기초공사를 마치고교인도 없는 상태에서 전도목사로 목사 임직을 받았어요. 그리고 한 달 뒤인 1984년 5월 5일 입당을 했습니다.
지금은 다른 높은 건물들에 가려져서 잘 보이지 않는데 교회가 있던 지역에 9평, 12평짜리 주택 7백60세대가 있었습니다. 동네에 젊은 부부들과 아이들이 많아서 5년 쯤 뒤에는 장년 1백50명에 아이들이 5백 명 출석할 정도로 성장했습니다. 교회가 비좁아서 건물을 계속 넓히다가 1989년에 현재 예배당이 있는 대지에 동시에 4백여 명이 들어갈 수 있는 두 번째 예배당을 건축했습니다. 처음에는 1백63평 대지를 구입했는데 그 후로 계속 확장해서 현재는 1천여 평 정도 됩니다. 이 대지 위에 2000년에 세 번째 예배당을 지었습니다. 여기에 복지관이 더해져서 현재의 모습을 이룬 것이지요.
▪ 고난이라는 스승
아들의 죽음이라는 고난은 저에게 큰 선생님이었습니다. 어떤 목회적 걱정이나 아픔도 이 상실보다 크지 않았기에 상황 앞에서 담대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슬픔 자체를 넘어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얼마 전 우리 교회 파송 선교사 부부도 자녀를 사고로 잃었습니다. 그 상황이 되면 어떤 위로의 말도 귀에 안 들어온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누군가는 위로해야 하기에 마음을 담아 메시지를 보냈지요. “감사합니다.”라는 단문의 답을 보면서 ‘아, 아직도 힘들구나.’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세 치의 짧은 혀로는 위로를 줄 수 없습니다. 자녀 넷을 다 잃은 큰어머니가 계시는데, 그분이 저에게 와서 그러시는 거예요. “조카, 나는 네 명이나 먼저 보내고도 살아.” 그때 비로소 작은 위로를 받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제 아내는 여전히 첫째 아이가 떠난 날이 되면 가슴앓이를 합니다. 응급실에 실려간 적도 있었지요. 이 이야기를 들은 교인이 지나가는 말로 “천국 갔는데요. 사모님이 잘 참으셔야지….”라고 하더군요. 순간적으로 속에서 별별 말이 다 나오려 하는데 참았습니다. 맞는 말이지만 그래도 그렇게 말하는 것이 틀릴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타인의 고난에 대해 우리는 함부로 평가하거나 신학적인 답을 내려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 하에서 된 것을 자기의 시각으로 바라보고 평가하는 것은 함부로 이야기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40여 년이라는 시간이 지나고 보니 이렇게 아들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가능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우리 부부는 아직도 첫째 아들 이야기를 서로 하지 않습니다.
저에게 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핏값과 아들의 핏값으로 세워진 교회이기에 목회하다 힘들면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핏값입니다. 그리고 아들의 핏값도 주님이 더 받으셨잖아요. 그러니 반드시 승리할 것을 믿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통곡하고 나면 마음이 시원해져서 다시 일어서길 반복하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 목포라는 토양에 복음을 심다
목회자 가정에서 태어난 것도 아니었고, 당시 양쪽 집안에서 신앙적 후원을 받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어서 목회의 여정은 홀로서기와 같은 외로움이 있었습니다. 아울러 청소년기의 제 이미지는 목회자와는 거리가 있었기 때문에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낸 목포에서 사역을 하는 것에는 일종의 꺼려짐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이곳에 개척을 시작하고 보니 부담보다는 고향이 주는 장점이 많았습니다.
제 부모님은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초등학교도 제대로 졸업하지 못하셨습니다. 배움은 짧지만 농사에 있어서는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계셨지요. 논밭의 토양에 따라 거기에 무슨 씨를 어느 절기에 파종해야 잘 자라는지를 꿰고 계시는 거예요. 고추 잘되는 곳에 고추씨를 뿌리고, 수박 잘되는 곳에 수박씨를 뿌려야 합니다. 아무 씨를 아무데나 뿌린다고 농사가 되는 것이 아니거든요. 같은 씨라도 토양에 따라서 다른 결과를 냅니다. 그러니 농부는 토양을 알고 다룰 줄 알아야지요.
목회도 복음의 씨를 뿌리기 위해 토양조사가 필요합니다. 복음이 심기워질 지역사회를 알아야 하는 것이지요. 특별히 그 지역의 니즈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필요를 채우는 사역은 척박한 토양을 복음이 잘 자랄 수있는 밭으로 개간하는 일입니다.
현재 우리 교회는 프로그램들을 도입하기보다 성경이 말하는 교회의 본질에 더 집중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좋은 프로그램과 방법론일지라도, 또한 그것이 대형교회들과 유명 도시에서 검증된 방식이라고 해도 토양이 달라지면 결과는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다르고, 문화가 다르고, 필요가 다르기 때문에 그 토양에 맞는 방식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목포는 애환과 한이 맺힌 눈물의 도시라고 불립니다. 우리 교회는 목포에서도 변두리에 해당하는 북항에 위치해 있습니다. 당시에는 ‘뒷개’라고 불렸지요. 지금은 바다를 매립해서 개발이 되었지만, 당시에는 이북 피난민들이 판잣집을 짓고 살던 피난민촌이었습니다. 삶이 어려우니 사람들도 어두웠습니다. 대화는 욕설로 시작해서 욕설로 끝났지요. 그래서 이 도시에 소망의 메시지를 전하기로 했습니다. 희망과 치유의 메시지를 전함으로써 말씀으로 사람들의 정서를 어루만지려고 한 것이지요.
▪ 하나님을 기쁘시게 사람을 행복하게
우리 교회 표어는 교회 세울 때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Soli Deo Gloria)입니다. 이 표어는 우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을 뜻하는데, 이것은 예배와 선교를 통해 이뤄집니다. 그리고 또한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사랑하고 섬기고 봉사하는 것을 통해 이뤄지지요.
그래서 우선 동네 어린이들을 데려다가 잘 교육했습니다. 어린이 목회에 중점을 둔 것은 첫째 아들이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나면서 깨달은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세상에 날 때는 순서가 있지만, 떠날 때는 순서가 없잖아요. 어린 아이라도 언제든지 주님이 부르시면 주님 앞에 설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도 빨리 복음을 전해서 이들을 구원받게 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우리 교회는 목포에서 어린아이들이 가장 많은 교회가 되었습니다. 1990년대 초 어린이선교원 붐이 일어날 때 우리 교회도 두 번째 예배당을 지으면서 선교원을 시작했고, 7~8년 전까지 이 사역을 계속했습니다. 이처럼 아이들에게 중점을 두다 보니 부모들은 자연스럽게 따라왔습니다.
어르신들도 정성껏 섬겼습니다. 지역에 있는 어르신 5백여 명을 매달 초청해 잔치를 해오다 2002년에 노인복지시설인 사단법인 주안원을 설립해서 본격적으로 노인 목회를 시작했습니다. 아이들과 어르신들에게 목회의 초점을 두었는데 신기하게도 그 중간이 자연스럽게 채워졌습니다. 저는 이것을 이미지 목회라고 부릅니다. 전도를 열심히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목사 자신이 동네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받고, 교회가 선하고 착한 일 많이 하는 교회로 소문나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찾아옵니다.
지금의 예배당이 20년 전에 지어진 것인데, 당시에는 이 주변에 높은 건물이 없었습니다. 완공되면 지역에서 가장 높고 잘 지어진 건물이 교회가 될 것이 분명했기에 교회 내부는 현대식으로 인테리어를 하더라도 교회 외관은 지역과 이질감을 갖지 않도록 붉은 벽돌을 사용해서 지었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지역사회에 오픈했습니다. 엊그제도 ‘목포시 노인 일자리 사업설명회’를 우리 교회에서 했습니다. 코로나19 시대에 방역지침을 지키면서 4백여 명이 모일 수 있는 공간이 흔치 않다 보니, 시에서 요청이 들어온 것입니다. 일평생 예배당에 한 번도 출입해보지 않은 타 종교 신자나 불신자가 이 기회에 교회 뜰을 밟아보고 교회에 관한 긍정적인 이미지를 갖고 가면 좋지요. 그래서 우리 교회는 누구에게나 늘 오픈되어 있습니다. 교회 정문 옆 게시판에 보면 ‘무료 사용 안내’푯말이 있습니다. 물, 화장실, 팩스, 휴대전화 충전, 복사 등 교회 시설과 기자재를 무료로 사용하도록 개방한지 오래되었습니다. 주민들을 위해 존재하는 교회라는 이미지를 주기 위함입니다.
▪ 이미지 목회
수적으로는 2003년 무렵이 교회가 가장 성장했던 시기였습니다. 교인 수가 3천2백 명 정도였는데 그 후로는 계속 감소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 수의 감소를 말할 때 사회 구조를 탓하기도 하는데, 목포시 인구가 줄지 않았으니 구차하게 핑계 댈 것은 없을 듯합니다. 지역사회에서 교회의 이미지가 이전과 같지 않아진 탓이겠지요. 교회가 자신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면서 힘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교회가 스스로 세상으로부터 비난받는 대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오늘도 보니 사건 사고 뉴스에 목사가 언급되네요. 이런 소식을 들을 때마다 얼굴을 들지 못하겠습니다. 교회는, 한편으로는 대사회적인 일을 더 겸손하게 열심으로 섬겨야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이미지를 실추하는 사건 사고를 일으켜 비난과 조롱의 대상이 되는 것을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세상으로부터 비난받지 않기 위해 유의하는 것과 아울러 세상으로부터 칭찬받는 일에도 주의가 필요합니다. ‘세상에서 칭찬받는 교회’는 우리가 꿈꾸는 교회이지만 기독교 역사 이래 세상으로부터 칭찬만 받은 교회는 없습니다. 경제논리로 말할 것 같으면 투자한 것에 비해서 결과가 보잘것없는 것이 이미지 목회입니다.
코로나19 시대에 교회 차원에서 재난지원금과 장학금을 지급하기로 결정하고, 1차적으로 선별한 몇백 명에게 지급했습니다. 그러자 대여섯 분이 감사하다고 회신을 보내왔습니다. 스무 개 교회에 50만원씩 지원금을 보냈는데 세 개 교회에서만 고마움을 표해 왔고요. 피드백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감사를 표할 줄 모른다는 사실은 안타까웠습니다. 고마워하기는커녕 오히려 ‘하나님의 것 가지고 교회가 생색내려 한다.’라는 식의 이야기가 들려올 때는 정말 가슴이 아팠습니다.
신앙이 있는 이들도 감사를 모르는데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감사를 알겠습니까. 그러니 교회가 아무리 선하고 착한 일을 많이 해도 세상으로부터 칭찬받기 어렵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합니다. 우리가 교회 살림 다 팔아서 세상에 나눠준다 해도 세상은 교회를 칭찬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교회에 ‘이래라, 저래라’ 요구는 많이 하지만 ‘잘했다’ 말하지 않습니다. 영이 다른데 세상이 어떻게 교회를 칭찬할까요. 그러므로 세상에 좋은 이미지를 주기 위해 애는 쓸지라도 세상으로부터 인정받는 교회가 되는 것이 우리의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칭찬은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께 받아야 합니다.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박해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경건하게 살고자 할수록 고난을 받는 것이 더 본질적입니다. 그러니까 공격받을 때 교회가 너무 움츠러들지도 말고 너무 민감하게 반응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는 묵묵히 우리 할 일만 하면 됩니다.
▪ 멀티 사이트 교회
우리가 목회하는 토양에는 우리 교회뿐만 아니라 이웃 교회들이 있습니다. 특정 교회가 대형화되면서 지역에 있는 작은 교회들이 피해를 보는 일들이 있지요. 우리 교회로 인해 피해를 본 교회들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반드시 확장되어야 하지만 우리 교회의 교세가 커지는 것을 하나님나라의 확장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 들었고 ‘아니다!’라는 것이 제 안에 들려오는 확고한 답변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멀티사이트 교회’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습니다. 멀티사이트는 미국에서 시작된 흐름인데 한국에서는 ‘지성전’이라는 개념으로 소개되고 적용되었지요. 그러나 용어나 개념에 있어서 성경에서 벗어난 부분들이 있어 보입니다. 제가 사용하는 ‘멀티’라는 개념은 ‘멀티탭’과 같습니다. 전혀 다른 기기들이 한 전원선을 통해 동일한 전력을 공급받아 작동되도록 하는 ‘멀티탭’처럼, 여러 교회가 신학과 사상과 프로그램을 동일하게 공유하는 개념입니다.
목포주안교회가 건강한 교회로서 잘 세워진 교회라는 전제하에 사람들이 계속 찾아온다면, 목포주안교회의 몸집을 키우기보다는 그 건강함이 동일하게 복제된 또 다른 주안교회를 세워 여러 지역으로 흩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는 그곳에 있는 사람들이 그곳에서 모여서 그곳에서 예배하며 그곳에서 복음을 전한다는 방향성 아래 몇 가지 원칙을 세웠습니다. 우리 교인이 적어도 40명 정도 살고 있는 지역일 것, 다른 교회가 근거리에 없을 것과 같은 것들입니다.
그리고 그 원칙에 따라 2009년에 세워진 교회가 남악주안교회입니다. 영상으로 예배를 드리던 지성전과는 달리 인격이 가서 예배를 인도해야 한다는 신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몇 년 동안 직접 가다가 지금은 노회에 정식으로 설립청원을 해서 하나의 교회로 독립했습니다. 신학과 비전과 프로그램은 두 교회가 공유하지만 물리적으로는 독립한 것이지요. 앞으로 동네에 이 정도 크기의 교회가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2백 명 기준의 예배당을 마련했습니다. 한국교회에 하나의 샘플로 제시한 것이지요. 그리고 5년 전에 용해주안교회를 시작했습니다. 이곳은 아직 제가 직접 가서 예배를 인도하고 있습니다. 또 해외에도 우리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베트남, 태국, 미얀마, 캄보디아에 멀티사이트 교회와 센터를 세웠습니다.
이러한 국내와 해외 멀티사이트 교회를 담당하는 목사님들은 대부분 우리 교회 출신으로서 목회자가 되었거나 우리 교회에서 10년 이상 부목사로 사역하신 분들입니다. ‘멀티’가 되기 위해서는 목포주안교회의 목회철학을 배우고 익히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나라의 확장은 교세 확장이 아니라는 신념 가운데 복음의 편만한 증거를 위해 이와 같은 결정을 했지만, 살덩이 같은 교회를 떼어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성도들도 떨어지지 않으려 하고요. 여전히 많은 고민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 본질에 관한 고민
목포주안교회는 올해로 38주년이 되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 저와 아내는 종합병원에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여러 차례 치료를 받았습니다. 특별히 저는 최근에 참 엄청난 수술들을 많이 해야 했습니다. 전립선암 3기 판정을 받고 수술을 했는데 후유증이 요실금이에요. 1년이 지나고서도 멈추지 않아서 인공적으로 조절할 수 있는 장치를 몸에 삽입하는 수술도 받아야 했습니다. 수술 후에 패드에 의존하며 강단에 서야 하는 시간은 불편하고 힘들었습니다. 부끄러운 상황들도 있었지요. 그런 상황들을 감춤 없이 이야기하니까 성도들이 “생전 안 아플 것 같던 우리 목사님이 아프니까 짠하다.”라 하더군요. 목회자를 짠하게 생각해야 기도도 더 할 듯해서 있는 그대로 이야기를 합니다.
병원에 입원하고 수술을 하면서 끝을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5년 정도 남았는데 ‘내가 마지막으로 하고 떠날 일’이 무엇인지에 관해 생각하게 된 것이지요. 그러면서 목회자로서 목양했던 교인들이 제가 은퇴하고 난 이후에도 끝까지 예수님을 믿고 천국까지 갈 수 있는가가 고민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의 교세는 거창하게 만들었어도 이 교회에 주님이 원하시는 열매가 없으면 의미가 없잖아요. 그래서 본질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성도가 성도답고, 교회가 교회다워야 한다는 명제는 분명하지만 ‘어떻게?’라는 질문에 답을 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저도 계속 고민하며 답을 찾아가는 중입니다.
▪ 동역자들에게 드리는 권면
저는 함께했던 성도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시험 들어 교회를 떠나게 되면, 지금도 자다가 일어나곤 합니다. “아니, 교인이 몇천 명 되는데 고작 한 명 나간 것이 대수야?”라고 할 수도 있지만, 목회자의 마음은 그게 아니거든요. 우리가 프로페셔널하지 않고 좀 부족할지라도,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교회를 섬기다 보면 하나님이 그런 순수함과 열정을 보고 쓰시리라 믿습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인지하는 것입니다. ‘누가 이 일을 나에게 맡겼는가?’,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가?’, ‘나는 이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 이것을 고민하면 답은 다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일이고, 나는 주의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고, 그리고 내가 최선을 다하여 정말 주님의 마음으로 열정적으로 사역을 하고 있다면, 내가 하고 있는 사역들의 규모와 영향력의 크고 작음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맡겨진 일에 충성했다는 인정을 받는 것이 관건이지요. 작은 일에 충성하면 큰일을 맡기십니다. 큰일을 맡기시지 않는다고 해도 낙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목회자에게 맡겨진 분깃에 관한 크고 작음의 사이즈는 사람의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니까요. 숫자에 기죽을 필요 없습니다.
큰 교회와 작은 교회, 도시교회와 시골교회 목사의 차이는 없습니다. 제가 작은 섬에 살고 있을 때, 그곳까지 와서 복음을 전한 전도사님이 안 계셨더라면 저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모두가 도시에서 사역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그곳에 와서 복음을 전하고 예수를 가르쳐줬기 때문에 오늘날의 제가 있는 것이고, 또한 저를 통해서 또 다른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고 하나님 나라는 이렇게 확장되는 것입니다.
교회 부흥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이지, 목사의 능력이 아닙니다. 목회자는 절대 착각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그 시대에 상황과 환경에 따라서 목회자에게 맡겨 주신 것이지, 목사가 대단하고 특별해서 이룬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수만 명의 교인들을 담당하는 목사에게 신안군 어느 섬에 와서 사역해 보라고 하세요. 과연 동일한 역사가 일어나겠습니까?
그러니 열정으로 맡겨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면 좋겠습니다. 목회는 어렵지요. 그러나 어떤 어려움이든 지나갑니다. 개척해서 닷새 만에 큰아들 잃어도, 이 또한 지나갑니다. 당장은 죽고 싶고, 더 이상 세상을 살아갈 희망과 용기도 없지만, 하룻밤 지나고 또 새날이 오면 달라집니다. 그러니까 잘 참고 끝까지 인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 설교자에게 드리는 부탁
미디어의 발달로 여러 목회자의 설교를 들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설교가 갈수록 어려워지는 듯합니다. 설교자를 세우신 목적은 하나님의 말씀을 풀어서 깨닫게 하기 위함인데, 어떤 분의 설교는 성경보다 더 어렵습니다. 성도들이 성경을 읽고 그 뜻을 파악했는데 목사님 설교를 듣고 더 헷갈린다면 그것은 설교가 아닙니다. 그런 설교자는 설교를 빨리 내려놓아야 합니다. 설교자는 단순명료하고 쉬우면서도 가볍지 않은 메시지를 전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한 명이라도 설교를 듣고 변화되게 하옵소서.’라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설교자의 능력으로는 결코 사람에게 감동을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출처-월간목회(2021년 5월호) 편집국장 박철홍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