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년 4월 3일 토요일, 오웬 선교사는 급성 폐렴으로 그만 사망하였다. 너무도 이른 죽음이었다. 참으로 열심내고 정성을 다한 전도자, 말 그대로 지사충성, 죽도록 충성했던 오웬이었다.
지나칠 만큼 날과 시간을 쪼개, 전남 일대를 다니며 전도하고 전도하는 일에 온 힘과 정력을 다했던 그였다. 가정의 식구들에겐 서운하리만큼 밖으로만 다니며 일했으니, 오죽하면 그의 어린 딸이 “왜 아빠는 집에서 지내지 않나요?”라고 했을까? 둘째 딸 룻(Ruth)이 1903년 생이니 대여섯 살 철부지 어린 딸은 아빠의 사랑스런 품이 항상 그리웠다. 어쩌다 함께 있을 때면 그리도 좋은 아빠인데 자주 집에 있지 아니하고 늘 어딘가 밖으로 돌아다닌 것이 못내 아쉬웠다.
오웬은 그런 사람이었다. 어린 딸들과 가정도 물론 그에겐 중요하지만, 도처에 죽어가는 전라도 인생들의 삶과 죽음에 대한 그의 안타까움이 훨씬 더했다. 저 세상의 생명과 소망없이 살아가는 인생들이 너무도 불쌍했다. 그들에 대한 하늘 사랑과 예수 구원의 복음을 하루 한시라도 빨리 더 많은 이들에게 전하고픈 욕구가 그를 집밖으로 내쫓았다. 그 충성과 열정이 그의 생명과 건강을 위협했고, 결국 아픈 이별을 초래하였다.
1909년 초, 추운 겨울이 지나 봄이 되려 하자마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 순회구역 전도 여행에 나섰다. 실상 봄이라곤 하나 꽃샘추위가 여전히 매서운 때였지만, 그의 앞선 의지를 누구도 말릴 수 없었다.
조사 배경수와 함께 광주 집을 나서 남으로 순회구역인 장흥으로 갔다. 그곳에서 항상 그렇듯이 성도들을 대하고 설교하며 세례 문답을 하던 와중에 그는 갑자기 쓰러지고 말았다. 평소에도 몸이 그리 건강하지 않던 그였다. 찬 바람이 여전한 상황에서 먼 길까지 찾아와 열심 내는 그의 몸이 너무 지치고 견디질 못하였다. 과로가 겹치는 와중에 갑작스런 한파가 몰려 오웬은 급성 폐렴에 시달렸다.
긴급히 광주로 후송되었다. 여러 사람들을 동원하여 낮과 밤을 달려 광주 양림동 제중원으로 데려 갔다. 윌슨 의사가 오웬을 대했을 때 자신은 어떻게 해야할지 난감했다. 외과 전문의였던 윌슨은 급하게 목포에 있는 내과 전문의 포사이드에게 전보를 치며 도움을 요청했다.
미국에서 치료차 안식년을 다녀온 지 불과 며칠 안되어 목포에 와 있던 포사이드는 긴급하게 광주로 달려갔지만, 그가 도착하기 전에 오웬의 숨은 이미 멈춰 있었다. 42년 인생, 조선에 선교사로 와서 목포와 광주, 전라도에서 11년간 그야말로 불꽃같은 전도자의 삶을 살다 갔다.
전남 선교사 가족의 막벨라
삼일 후 4월 6일 유진 벨과 선교회는 장례를 치루고 오웬을 땅에 묻었다. 그곳이 지금의 호남신학대학교 언덕 위에 있는 선교동산 묘지의 시작이 되었다. 아브라함이 헷 족속에게서 사들인 헤브론 막벨라 동굴은 먼저 죽은 아내와 이후 세상을 달리한 그와 후손 가족들이 누워있다. 미남장로교 전남에서 사역한 선교사들도 사망한 이들이 함께 누워있는 막벨라가 바로 양림동산이다.
오웬은 미남장로회 조선선교회 사역자로서는 4번째 순직자였다. 1901년 최초로 사망한 유진 벨의 아내 로티 사모는 서울 양화진에, 1903년 두 번째 사망자 린니 데이비스는 전주에, 세 번째 사망자이며 한 해 전 1908년 1월에 죽은 전킨은 군산에, 그리고 네 번째가 되는 오웬은 양림동에 안치하였다.
오웬이 죽고 난 이후 1914년, 오웬 기념각이 양림동에 세워졌다. 스와인하트 선교사가 건축한 이 기념각의 정문 현판에는 ‘윌리엄 오웬과 클레멘트 오웬을 기념하여’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오웬은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일찍 죽었다. 그는 조부모 손에서 자랐고, 상당히 부유했던 할아버지(윌리엄 오웬)의 사랑과 후원을 힘입고 오웬은 선교사로서 조선에서 헌신하였다. 오웬은 광주에서 사역하면서 무엇보다 교인들을 말씀으로 가르치고 훈련할 수 있는 건물이 세워지길 소원하며 할아버지에게 요청도 하였었다. 아쉽게도 살아 생전에 이루진 못하였으나, 멀리 미국에서 손자의 슬픈 사망 소식을 접한 할아버지는 헌금을 추가로 1천 불을 기부하였고, 오웬이 평소 모으고 있었던 3천 불을 그의 아내 휘팅이 내어 놓아 합계 4천 달라의 건축비로 광주에는 또 하나의 멋진 기적을 드러낸 것이다.
오웬이 남긴 이 귀한 건물은 광주 교회에 참으로 요긴하게 사용되어 왔다. 수 백 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당시로선 매우 큰 시설로 각종 사경회나 부인 조력회 등을 할 때 참으로 멋지게 활용되었다. 광주 기독교의 부흥과 성장의 촉매 역할을 톡톡히 해 낸 공간이 되었던 오웬 기념각은 문화재로 지정되어 기독간호대학 옆에 현존하고 있다.
오웬이 떠난 광주에서 아내 조지아나 휘팅은 오래도록 본연의 선교 사명을 다했다. 광주의 여성 사역과 성경공부 지도 등으로 10여년을 더 사역하다 1920년 미국에 돌아가 은퇴하였다. 고향인 메사추세츠 스프링필드와 뉴욕 퀸즈에서 거주하였으며, 1952년 1월 24일 콜로라도 주 덴버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별세하였다. 휘팅의 묘는 덴버 페어마운트 묘원에 있다.
남겨진 어린 4명의 딸들에겐 참으로 아빠의 부재가 남은 생애 내내 고통이었으리라. 자라면서 잘 느껴보지 못한 아빠 오웬을 사람들이 존경하고 높이 평가할 때마다 어린 딸들은 감당하기 어렵고 무겁기만 했을 것 같다. 대부분 그 존재의 흔적이 가려져 있고 씁쓸함이 앞선다. 아버지 오웬은 많은 다른 사람들에게 선한 본보기로 신앙의 감동으로 1백년 넘게 흘러 넘치지만, 네 딸과 자손들의 알려지지 않은 삶의 어두운 뒷그늘은 못내 아쉽고 안타깝다.
오웬 사후 유진 벨과 프레스톤은 광주의 남동부 지역인 화순, 보성, 광양 순천 등지를 순회할 때마다 실로 놀라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 현장마다 믿음의 공동체들이 심지 깊게 자라고 있었고 성장세가 타 지역에 비해 훨씬 빠르게 자랐기 때문이다. 각 마을의 조그마한 교회마다 상당히 활기찼다. 조사나 영수들은 대부분 충성스럽고 신실했다. 오웬은 살아 생전에 그런 얘기를 전해 주지도 않았고 어떤 낌새도 느끼지 못했기에 여타 선교사들이 받는 감동과 오웬에 대한 경외감은 컸다. 자기 일을 묵묵히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감당할 뿐, 세상적 평가나 열매로 자랑하거나 우쭐대지 않았던 오웬이다.
하나님 앞에서 묵묵히 자기 일을 하며 겸손하였던 오웬, 그와 11년 함께 지내며 그를 몰랐던 것은 아니었지만, 유진 벨은 그가 죽어가면서까지 남긴 감동과 슬픔에 한없이 회한스러웠다. 가장 가까운 벗이요 동역자였던 오웬을 잃은 유진 벨은 참으로 슬프고 힘들었다. 8년 전 로티를 잃은 이후 당하는 가장 큰 고통이었다. 자라온 환경이 너무 다르고, 교회와 사회에 대한 이해나 기질과 성격도 너무 달랐던 오웬이기에 자주 다투기도 하고 마음 상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지난 11년 동안의 동고동락은 그 누구와도 해보지 못한 두 사람 만의 인생이요 선교 사역이었지 않는가.
유진 벨과 오웬 선교사. 늘 힘이 되고 격려와 우정이 되었던 두 사람으로 목포와 광주, 전라남도의 교회와 기독교가 세워지고 오늘날까지 복에 복을 누리는 결실이 되었다. 오웬은 먼저 가고 유진 벨은 남겨진 자의 책임과 사명을 기억하며 오웬의 몫까지 더 열심 충성하기로 슬픈 눈물을 훔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