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권기독교근대역사기념사업회 콘텐츠위원 김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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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는 현지에 도착하여 가장 먼저 해야 할 책무가 현지 언어를 익히는 일이다. 누구도 예외가 없이 가장 중요하고 우선되는 일일 게다. 유진 벨도 그랬다. 1895년 4월에 조선에 도착하여 1898년 봄 목포 현장에 부임하기까지 약 만 3년여 동안 어학선생을 개인적으로 고용하여 부지런히 언어공부를 하였다. 아내 로티도 따로 개인교사를 두고 매일 아침 조선어를 익혔다.
그리고 틈틈이 지방 순회 답사를 다녔다. 선교회의 결정에 따라 주로 봄 가을에 다녔다. 덥고 습한 여름엔 관악산 등지에서 추운 겨울엔 딕시 집에서 쉼과 재충전으로 준비기를 가졌다. 1893년 1월 선교공의회 예양협정에 따라 전라도를 배정받은 미남장로교 선교회는 전라 일대에 대한 조사와 정탐을 하는 한편, 서울에 주로 거주하는 동안에도 전도하며 교회 세우는 일에 나서기도 하고 기존의 미북장로교 선교회가 펼쳐놓은 사역에 조금씩 협력하며 실습에 나서기도 하였다.
7인의 선발대가 처음 서울에 와서 정동의 딕시에 거주하며 지냈는데, 당시 그 일대가 외국 공관도 많이 있어서 상대적으로 안전한 지역이라는 이점도 있긴 했다. 그러나 조선인들이 이 지역 안에 들어오는 게 어려운 구조라 조선인과의 접촉이 어려웠다. 선교사는 현지인들을 찾아 만나야 하고 현지인들이 자연스레 찾아올 수 있어야 하는데 딕시는 그런 점에서 한계가 많았다.
이에 전킨은 딕시에 들어온 지 1년 후인 1893년 12월 서소문 밖에 따로 집을 얻어 거기 거주하였고, 조선의 평민들이 수월하게 전킨의 사랑방을 드나들 수 있었다. 1894년에는 의사 드루가 새로 조선에 왔고, 그가 전킨의 사랑방에서 진료 활동을 벌이면서 조선의 환자들과 사람들이 많이 찾아왔다. 그렇게 해서 전킨과 드루는 이곳 서소문에서 교회를 세워 복음 전하는 사역을 펼쳤다.
서소문교회를 통해 승려가 개종하는 일도 생기고, 전킨은 두 명의 세례 교인도 얻게 되었다. 이 교회는 전킨이 1896년 군산에 완전 이주하면서 인근 서대문의 새문안교회(언더우드 담임)에 통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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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트라 여장부, 린니 데이비스 선교사 |
리니 데이비스가 세운 인성부재 교회
데이비스와 레널즈가 세운 교회도 있었다. 활달하고 적극적인 여성 선교사 리니 데이비스는 미남장로교 선교사 가운데 가장 먼저 조선에 도착한 선교사다. 1892년 9월 미국에서 7명이 함께 파송예배도 드리고 출발도 같이 했지만, 조선 서울에 도착한 것은 제일 먼저였다.
데이비스(Linnie Fulkerson Davis)는 1862년 버지니아주 에빙던(Abingdon)에서 출생하였다. 미남장로교 첫 7인의 선발대로 조선에 올 때만 해도 매티 테이트와 함께 미혼이었다. 초기 서울 정착기간 중에는 인성부재 교회를 세웠고, 전라도 선교가 전개될 무렵엔 군산에 파송되어 전킨을 도와 부녀자와 아동 사역에 힘썼다.
1898년 6월 9일 서울 도티 선교사 집에서 4살 연하의 해리슨과 결혼식을 레널즈 주례하에 올렸다. 조선에 온 미남장로교선교회의 최초 커플이었다. 사역지를 옮겨 전주에서 해리슨과 함께 선교사역에 충성하였는데, 평소 열정적이고 의욕 충만으로 너무 열심인 탓에 건강이 늘 좋지 못하였다. 그녀는 1903년 결핵으로 41세 젊은 나이에 사망하였다.
미스 데이비스가 초기 서울 딕시에 머물 때 조선 사람들은 의혹의 눈총을 보냈다. 미혼인 여성으로서 딕시 가정에 다른 유부남 가족들(전킨과 레널즈)과 함께 지내는 것이 불편하게 보였다. 그래서 데이비스는 딕시를 떠나 1894년 봄 도티 양의 집으로 이사했다. 이곳에서 어린이와 부녀자들을 집으로 초대하여 찬송도 가르치고 성경도 가르쳤다.
지금의 서울 중구 인현동에 있었던 이 집은 예전부터 선조 임금의 7남인 인성군이 살았던 지역으로 인성군의 '부(府)' 가 있다는 뜻의 '인성부재'로 불리던 동네였다. 그래서 데이비스 집에서 시작한 모임도 인성부재 채플이라 불렸다. 1894년 데이비스 개인 보고에 따르면 그녀는 당시 1,693명의 부녀자들의 방문을 받았고 80가정을 방문하였으며, 1,000권의 책과 유인물을 배포하였다고 하였다. 울트라 여장부로 불렸던 그녀답게 전라도에 내려가기 전에 이미 서울에서부터 활발하게 전도하며 선교활동을 펼쳤던 그녀다.
린니 데이비스의 열심 있는 사역으로 인성부재 모임에는 남자 어른들도 찾아오게 되자, 데이비스는 레널즈 목사를 초대하여 교회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이렇게 레널즈와 데이비스가 인도하는 ‘인성부재 교회’와 전킨과 드루가 하는 ‘서소문 교회’가 전주 군산 지역 사역이 본격화되기 전까지 미남장로교 서울 선교의 결실이었다.
유진 벨은 서울에 있었던 두 교회를 틈틈이 보조하며 함께 하였다. 전킨과 레널즈가 각기 전라도 등 타지에 출장을 다닐 때면 어김없이 유진 벨이 대신하여 설교하곤 하였다. 자신이 미리 준비한 영어 설교를 선배 선교사들로부터 미리 조선어로 지도 받은 후 미숙하나마 조선인 신자들에게 조선어로 하늘의 말씀을 선포한 것인데 조선에 온 지 만 1년이 지났을 때였다.
저는 지난 일요일 30여명의 성도들에게 첫 한국어로 설교하는 예배를 드렸습니다. 레널즈 목사는 무어 목사가 사역하는 교회(곤당골-승동 교회)에서 설교하였고, 레널즈의 교회(인성부재 교회)는 제가 대신 설교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22장 1절부터 14절까지의 본문을 가지고 설교하였습니다(1896년 4월 21일).
또한 유진 벨은 조선에 들어와 활약하던 장로교단의 연합공의회 일군으로 함께 참여하여 이미 서울 등지에 세워져 있던 교회의 예배와 세례 등을 함께 진행하기도 했다. 언더우드 목사가 담임하는 새문안 교회 예배위원으로 세례 문답을 같이 한 것이다.
우리 선교 사역의 놀라운 열매에 대해 말씀드립니다. 호주장로교, 미북장로교, 미남장로교 등 한국에 있는 세 장로교선교회는 한국에서 하나의 장로교단으로 모든 일을 연합하여 합니다. 조선인 스스로의 교회가 조직되기 전까지는 선교사들로 이뤄진 총회에 의해 관리됩니다. 저는 이 총회의 올해 위원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우리는 지난 두 주 동안 오후에 세례 문답을 하느라 바빴습니다. 언더우드 선교사가 서울에서 담당하는 교회(새문안)에서 50명을 이미 문답하였고, 그 가운데 30명을 세례자로 허락했습니다. 나머지 사람들에겐 대기, 또는 교리 과정으로 넘겼습니다(유진 벨, 1897년 1월 3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