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권기독교근대역사기념사업회 콘텐츠위원 김양호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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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 2월, 내한 선교 2년 차를 시작하면서 유진 벨은 지방 선교지 답사 여행을 시도하였다. 이번 여행은 3주간의 전라도 특히 목포를 정탐하는 것이었다. 유진 벨은 지난 첫 지방 답사인 강경에서는 설사와 홍역으로 실패하였기에 두 번째 답사 나서는 마음 가짐과 의욕이 더 대단했으리라. 레널즈 선교사와 함께 한 여행이니 더 안심도 되고 처음 가는 지역에 대한 호기심만큼이나 선배와의 좋은 교제가 기대되었다.
유진 벨은 목포가 처음이지만, 레널즈는 두 번째다. 그는 2년 전인 1894년 봄에 이미 다녀본 적이 있다. 그것은 미남장로교 선교사들이 조선에 와서 전라도 전체에 대한 답사를 맨 처음 시행한 일이었다. 당시 레널즈와 새롭게 부임한 지 불과 며칠 안 된 드루 의사 두 사람이 한국인 조사를 데리고 한 여행이었다. 3월 27일 서울을 출발하여 군산 전주부터 남으로 내려와 고창 영광 목포를 거쳐 해남 고흥 순천과 여수를 둘러보고 부산을 거쳐 서울에 5월 12일 돌아오는 여행이었다. 레널즈는 매일 꼬박 꼬박 여행 일지를 기록하였는데, 4월 18일 도착한 목포에서의 인상을 이렇게 남겼다.
목포에 한 시 쯤 도착하여 점심을 먹고, 3시 쯤 썰물 때가 되어 작은 배를 탔다. 어두울 때 도착해서 사공의 집에서 묵었는데, 그곳은 파도가 높은 섬으로 경관이 아름다웠다. 작은 숲에는 사당이 있었다.
목포에서 림피 출신의 한 젊은 지식인을 만났는데, 그는 천주교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또 서울에서 온 젊은 남자도 만났는데, 그는 남대문 안에서 언더우드가 주관한 예배를 드린 적이 있다고 했다. 그는 수다스러운 그리스도교 신자였다. 서울에서 쌀 선박을 타고 왔고, 다시 돌아가기를 기다린다고 했다. 20여 척의 선박이 쌀을 한가득 싣고 정박되어 있었다.
물의 깊이는 팔 길이의 약 30배 정도로 깊었다. 웅장한 풍경이 보였다. 마을에서 바다 쪽으로 0.5마일 떨어진 곳에 선교회를 위한 좋은 부지를 점찍어 뒀다. 근처 도시들 중 인구가 가장 희박한 곳이었다. 섬 사이를 지나는 뱃길을 따라 즐거운 여행을 했다. 근처는 섬 천지였다. 파도가 심했지만, 제물포에서보다는 덜했다(레널즈, 1894년 4월 18일).
레널즈에게 목포가 선교회를 이루기 위한 좋은 곳이었다는 인상이 있는 터에 곧 개항이 될 것이라는 소문이 자자했기에 레널즈는 다시 찾는 목포에 대해 이번엔 전에 보았던 부지를 매입하고자 하는 의욕이 있었고, 선배를 따라 나선 유진 벨로서는 이곳이 자기에게 책임이 주어질 수도 있다는 기대감을 갖고 시작한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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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를 최초로 찾은 외국 선교사 레널즈가 1894년 4월 18일 방문하여 남긴 기록 |
선교하기 적절한 곳, 목포
전주는 이미 석달 전 1895년 12월 성탄절 무렵에 테이트 남매가 완전 이주하여 본격적으로 전주 선교부를 열었고, 군산은 이번 봄이 되면 전킨과 드루가 완전 정착하여 군산 선교부를 열 예정이었다. 1892년 7인의 선발대가 조선에 처음 와서 3년여 서울에서 준비하며 수차례 군산과 전주를 답사하고 준비하던 끝에 이번엔 제대로 전라북도 선교에 뛰어드는 상황이었다. 이들 선배 선교사들은 서울 거주지에서 완전히 전주와 군산으로 이사하여 전라도에서 살면서 선교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미남장로교조선선교회가 전라도 지역을 선교지로 배당 받아 전라 북쪽에 해당하는 전주와 군산에 스테이션 설치가 진척이 이뤄져 가는 상황에서 이제 전라 남쪽에도 새로운 기지를 설치하고 선교 전선을 보다 넓히기 위한 조치로 이 일은 레널즈와 신입 후배인 유진 벨에게 책임이 맡겨졌던 것이다.
선배들이 그동안의 준비를 거쳐 전주와 군산에 정착하고 선교 현장에 투입되는 상황을 지켜보며, 유진 벨도 더더욱 의욕이 충만했으리라. 지금 찾아가는 낯선 도시 목포는 아직 아무도 들어간 적이 없다. 전혀 생소하지만 남이 밟지 않은 자신이 처음 개척하고 사역할 수 있다는 기대감에 의욕을 앞세웠으리라. 제물포를 떠나 배를 타고 내려가는 서해안 바다 위에서 그가 불렀을 하늘 노래 찬양이 얼마나 힘찼을까!
하나님 나라 일군이 성령 충만 은혜 입어 힘차게 복음의 진군을 할 때마다 세상과 사탄이 순풍만을 허락하진 않는다. 잘되기만 하고 형통하기만 하면 얼마나 좋으랴. 역풍도 만나고 일이 꼬이기도 하는 법이다. 지난 번 강경에서의 고충은 이제 없으려니 했는데, 이번에도 장벽에 부딪혔다.
목포에 거의 다다를 즈음 풍랑이 거세게 일었다. 배가 몹시 출렁였고 급기야 주변 섬 근처에 불시착하듯이 머물러야 했다. 이번엔 상당한 멀미에 시달려야 했고 레널즈도 마찬가지였다. 서해 바다에 비하면 그보다 몇 십배는 더 크고 광활한 태평양도 건너왔던 그들인데, 그때 겪었던 것보다 훨씬 더 심하게 배를 움켜쥐고 뒹굴어야 했다.
대체로 우리 여행은 좋았고 성공적이었습니다. 레널즈 목사는 여러 차례 복음을 전했고, 집을 짓기 위한 좋은 땅을 샀습니다. 2에이커 땅을 은화 51불에 샀었습니다. 이곳에 오는 동안 폭풍으로 배가 섬 뒤쪽에서 3일간이나 머물러야 했습니다. 레널즈 목사는 배멀미로 앓아야 했고, 저도 잠시 동안은 태평양에서 겪었던 것보다 더 심하게 아팠습니다(유진 벨, 1896년 3월 3일).
폭풍우를 만나 한 섬에 배가 머무르며 멀미 고통을 겪을 때가 1896년 2월 12일이나 13일이 아닐까 싶다. 이 섬은 신안군 압해도로 추정한다. 압해도에서는 이 무렵 기독교 선교사들이 섬에 들어와 복음을 전했다는 구전을 갖고 있다. 정확히 기록에 의한 것은 아니지만, 아무 근거도 없이 말과 말이 이어질리는 없으니 전혀 사실무근이라 폄하할 수도 없다. 유진 벨이나 레널즈가 남긴 어떤 기록에도 정확한 이곳의 지명이 없으니 아쉬울 뿐이다. 그런데 압해도 주민들의 말처럼 그 짧은 시간에 제대로 복음이 잘 전해졌는지 의문이다. 그들은 멀미로 정신을 못 차릴 지경이었고, 풍랑 속에서 섬에 입도할 상황이 아니라서 말이다.
배멀미를 톡톡히 치루고 목포에 닿아서 3주 정도 레널즈와 유진 벨은 목포 이곳저곳을 다녔을 것이다. 당시의 목포는 유달산 아래 작은 포구에 지나지 않았고 주변이 대부분 바다로 둘러싸여 있으며 땅이라곤 거의 없는 바다와 섬 천지였다. 그런 상황인데도 장차 선교부를 개설해야겠다는 마음으로 무려 2에이커 약 3천평에 해당하는 넓은 부지를 매입했다니 참 대단하다. 너른 미국에서 지내다 온 선교사들에게 그 정도 땅은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여러 채의 사택은 물론 교회, 학교, 병원 등 복합 단지를 만들 계획이 이미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