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재 목사
(전,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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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존심」이란 ‘제 품위를 스스로 지키는 마음’을 말한다. 이 낱말을 자만 또는 오기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자만(自慢)은 ‘자신을 남 앞에서 뽐내는 오만한 행동’을 말하고, 오기(傲氣)는 ‘능력이 부족하면서도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마음’을 말하기 때문이다. 「자존심」이 미덕(美德)의 원천이라면, 자만과 오기는 악덕의 원천이다. 그래서 당당한 자존심은 사람을 빛내고 향기롭게 만든다.
목하 대한민국은 이 자존심이 완전히 구겨진 형국이다. 동양예지국(東洋禮之國)이요, 세계 경제 10위의 선진국이라는 우리 나라, 그것도 수도 서울 한복판 용산구 이태원동에서는 일어나서도, 있어도 안 될 참극이 벌어졌다는 것은 한 마디로 권력에 취한 자들의 자만과 오기가 책임을 방기(放棄)한 결과이다.
핼러윈(Halloween)은 미국의 대표적인 어린이 축제이다. 미8군사령부를 끼고 발전한 이태원은 문자 그대로 미국 문화거리로 많은 시민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10월 31일 핼러윈을 앞둔 29일은 주말이요, 코로나 팬데믹으로 제한을 받던 남녀노소가 야외에서는 마스크를 벗을 수 있고, 거리 두기에서 해방되어 모처럼 들뜬 기분으로 핼러윈 데이를 즐기기 위해 모여든 수가 무려 12만 명, 가족들을 따라 나들이 한 중고등학생들이며, 휴가 중인 군인들과 남녀 연인들을 물론, 다수의 외국인들도 호기심어린 기분으로 그곳을 찾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 어찌된 일인가. 다수의 군중 질서 유지와 통제 기능을 살려야 할 행정과 경찰 시스템은 전혀 작동하지 않았다. 그날 출동한 경찰력은 마약 단속, 교통 질서, 방범을 위해 137명이 동원되었을 뿐, 안전 예방 차원의 행정력, 경찰력은 전무했다. 용산의 대통령실과 비어있는 대통령 관저와 광화문 일대의 정치집회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둠이 깔리는 6시30분 경 “살려 주세요, 압사 당할 것 같아요”하는 112 신고가 있기 시작하면서 해밀턴호텔 옆 좁디좁은 내리막 골목길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될 줄은 누가 짐작이라도 했으랴. 다급한 112 신고가 11시 넘도록 수 없이 있었지만 무위였다니 기가 찬다.
참사 후, 정밀 조사 결과 비탈진 골목의 길이는 14미터, 폭은 4미터인데 불법시설의 돌기로 실제 3.2m, 뒷골목에 웅집한 군중이 무려 1만 8백 명, 1제곱미터 당 16명의 군중밀도 상황에 골목길을 내려가려는 사람들과 오르려는 사람들이 서로 뒤엉켜 마치 파도타기 하듯이 이리저리 떠밀리다가 넘어져 엄청난 참상을 만들어냈다고 보도했다. 대도시 참사는 희생자를 선별하지 않는다. 모처럼의 나들이에 세계 각국의 먹거리를 골라 사먹고, 핼러윈 가면과 풍물이며 사람 구경하며 즐긴다고 나선 젊은이들이 정부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가운데 354명의 큰 피해자가 발생, 그중 158명이 피지도 못하고 산화(散花)했으며, 사인(死因)은 압착성질식사란다. 얼마나 밀리고 끼이고 밟혔으면 심장이 멈췄을까?
철저한 관재(官災)였다. 용산소방서장의 진두지휘 아래 피해자 병원 이송과 심정지 상태에 있는 피해자들을 살리기 위해 심폐소생술에 참여했던 영웅들의 눈물겨운 회한 중 3-4분의 골든타임을 놓쳐 눈을 감겨야 했던 희생자들에 대한 통절함의 호소는 지금도 필자의 가슴을 짓누른다. 196명의 중경상자들 중에는 안심 못할 중증환자, 평생 후유증을 앓으며 고통 가운데 지내야 할 이웃들도 있으리라. 부모와 가족들의 가슴에 박힌 못은 과연 누가 어떻게 뽑아 줄 것인가!
안전은 예방이며, 치안은 헌법에 명시되어 있는 국가의 의무이다. 그럼에도 행정, 치안 당국은 왜 이와 같은 사건사고의 예방조치에 안일하게 방기하여 엄청난 국민적 고통을 안겼을까? 더욱 이해 불가능한 점은 참사 다음날, 당국은 참사를 사고로, 희생자를 사망자로 용어를 통일하고, 리본은 ‘근조(謹弔)’의 글씨가 없는 단순 리본을 패착하라는 지시를 공문으로 하달했다는 소식이었고, 서울 시청 광장을 비롯한 분향소의 간판 글귀는 그렇게 바꿔진 것을 TV로 볼 수 있었다.
2014년 4월, 세월호 침몰 참사 사건으로 트라우마에 빠진 제자 목사로부터 도저히 강단에 설 수가 없으니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은 필자는 만 한 달 동안 전철 4호선을 타고 안산 중앙역에 설치되어 있는 분향소를 찾았고, 고잔동의 성민교회 공동체와 아픔과 슬픔을 나눈 적이 있기에 피해자 가족들의 마음을 깊이 공감할 수 있다. 그런 까닭에 희생자의 영정과 이름도 없이 뭉뚱그려 국화꽃 장식으로만 망자를 표현한 것 역시 유가족의 동의에 앞서 관(官)이 주도하는 전략이 우선되었다는 의구심을 지울 수가 없다.
막을 수 있는 일을 막을 수 있도록 노력하고 계획하고 실천하는 안전 제일주의 사회를 만드는 것이 정부의 책임이요 의무이다. 그러나 원통하게도 정부 시스템은 작동하지 않았다. 아니, 그날 이태원에 정부는 없었다. 이렇듯 이태원 좁은 골목에서 귀하디귀한 생명이 허망한 죽음을 맞은 다음날 아침, 국민의 안전을 총책임지고 있는 행정안전부 장관의 말은 필자의 귀를 의심케 했다. “경찰이나 소방을 미리 배치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던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특별히 우려할 정도로 많은 인파가 모였던 것은 아니다.”
당장 머리 숙여 사죄를 해도 모자랄 판에 희생자들과 유가족, 국민들의 고통에 전혀 공감하지 못하는 책임 회피에 급급한 주무 장관의 망언에 공분을 느낀다. 무한 책임을 져야 할 대통령은 석고대죄하는 심정으로 진정어린 대국민 사죄를 하는 것이 도리임에도 부끄러움도 모르고 오히려 경찰을 향하여 호된 꾸지람을 날렸고, 국무총리는 외신기자 간담회에서 농담을 하고 웃어서 국민들을 경악케 하였다. 용산구청장은 “핼러윈을 축제가 아닌 ‘현상’으로 보아야 한다”는 궤변을 늘어놓으며 거짓말로 일관했다. 국가재난 관리 시스템 책임자들의 무지, 무능, 무책임이 빚어낸 작동 정지 사태는 가히 ‘정치적 애도’가 파생시킨 무의식적 실수가 더 큰 정치적 문제를 야기한 슬픈 사례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신들의 자녀가 그랬다면 어떠했을까?
무너진 국가의 안전관리체계에 분노하고 있는 민의에 민감하게 반응하여야 할 것이다. 변명과 거짓은 또 다른 비극을 만들 뿐이기 때문이다.
8년 전 세월호 참사 구조와 수습 과정에서 당시 박근혜 정부는 “이게 나라냐?”하는 비판을 받았다. 이번 10.29 참사에 대해서 “국가는 왜 존재하는가, 위험할 정도로 인파가 몰릴 것을 미리 예상하고 정부는 사전에 예비했어야 했다”는 어느 정치인의 지적은 전적으로 옳다. 지금 정부는 이번 참사에서 국가와 정부의 존재 이유에 대한 국민의 엄중한 물음에 통절한 마음으로 진솔하게 사죄로서 답해야 할 것이다. 여야할 것 없이 제발 ‘애도적 정치’는 그만 거두어라. 죽음에 대한 태도가 정치적 유·불리에 따라 바뀌는 풍경을 ‘세월호 참사’ 때도 보았고, ‘10.29 핼러윈 참사’에서도 똑같이 목도하고 있어 화가 난다. 해양수산부 공무원 한 사람의 억울한 인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UN 본부를 찾아가고 전 국방부 장관까지 구속시킨 정부가 158명 알파(α)의 참사자 인권에는 왜 이리 소극적이며 비공개적인가? 지난 세월호 참사 때처럼 몰아칠지 모를 유가족들과 시민사회로부터의 비판과 저항이 두려워서인가? 정부가 이번 참사에서 책임을 최소화하기 위해 국민 정서에 반하는 잘못된 방향으로 애쓰는 모습에서 비굴함을 감지하는 것은 필자만의 오버(over)는 아닐 것이다.
‘추모의 정치’는 재난을 함께 겪은 ‘산 자들의 실천’과 연결된다. 늦었지만 가장 먼저 통치자의 진솔한 대국민 사죄가 있어야 한다. 이것이 정치적 결자해지(結者解之)의 첨경이며 이어서 책임자의 문책이 따라야만 한다. 그런 다음에는 법적으로 비극적 참사의 실체가 규명되고 이에 부응하는 희생자에 대한 응분의 배려가 이루어져야 국가는 정상을 찾을 것이다.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앞으로 한국 사회가 변화해야 할 방향을 정하고 법적·제도적 개혁을 단행할 수 있어야 한다. 이와 같은 용기있는 조치가 「자존심」있는 정치인 것이다.
미래를 향해 행동하고 실천하는 힘은 “함께하고 있다”는 “정직한 믿음”에서 나온다. 권력의 도취로 민주주의를 위장한 어설프고 비효율적인 관료주의 존비에서 벗어나 성숙한 시민의식에 걸맞은 국격있는 선정(善政)을 베풀 때, 354명 더하기 이태원 현장에서 겪었던 모든 민·관(民官)들의 통계적 ‘집단’이 아니라 ‘집단’의 개인, 즉 각각의 담겨 있던 이야기와 온 국민의 슬픔이 ‘안전 제일의 나라’, ‘정치적 애도’를 극복하고 ‘추모의 정치’로 향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2022년 11월 24일은 추수감사절이다. 한해 동안 주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이날, 필자는 너무도 슬픈 마음을 억누르며 희생자들을 추모하며 삭막한 광야에서 “죄와 슬픔 중에서 우리 건져 주소서” 찬송을 부른다.
교회여! 함께 통회의 기도를 드리자. 주님의 이름으로 세상을 더 깊이 사랑하자.
“상전들아 너희도 저희에게 이와 같이 하고 공갈을 그치라. 이는 저희와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니라”(에베소서 6장 9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