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재 목사
(전,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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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형. 또 펜을 들었소. 바야흐로 한국 교회의 변화와 개혁을 열망하는 뜻 있는 소리가 들려오기에 들뜬 마음으로 이렇게 펜을 들었습니다. 경건의 능력을 잃어버린 이 땅의 교회들이 바로 ‘지금’ 갱신하지 않으면 미래가 없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회개 운동을 일으키고 있는(욥42:3-6, 참조) A형으로부터의 소식은 매우 희망적이기 때문이오. 사실 입술로 갱신(更新, renewal)을 외치기는 쉽지만 실제 진실함으로, 행함으로 갱신하기란 “뼈를 깎는 아픔”을 겪어야 하는 벅차고 고통스러운 과정입니다. 그러함에도 「하늘의 시민권자」들로 구성된 <교회>가 뼈를 깎는 고통을 기쁨으로 받아들여 <교회>의 참 모습을 세상에 반듯하게 보이는 것이 시대 정신이라 반드시 겪어야 할 과정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이란 광야와 같은 낯설고 엄혹한 땅에서 「신앙하기」라고 정의 할 수 있겠습니다. 형과 나는 「하늘의 시민권자」이지 「영주권자」, 즉 외계인이 아니기에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벧전2:11) 이 세상 삶에서도 시민권자의 품격을 잃지 말아야 하는 것이 마땅한 삶의 자세이지만 그렇지 못한 나약한 인간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민권자」(헬, politeuma)는 「그 나라에서 영원히 살 수 있는 권리를 취득한 시민」을 일컫는다면 「영주권자」는 ‘그 나라에서 일정 기간 오래 살 수 있으되 외계인’이란 신분입니다, 이 얼마나 엄청난 신분 상 차이입니까? 그러므로 「하늘의 시민권자」인 그리스도의 지체들은 나그네 생활을 마치고 본향으로 갈 때에도 떳떳해야 한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기에 더욱 정신을 차리게 됩니다.
J형. 그럼에도 오고오는 역사 선상에서 「하늘의 시민권자」인 나를 비롯한 많은 그리스도의 지체들이 낯설고 엄혹한 세상에 살면서 인생의 매뉴얼(manual)인 성경을 오해하고 오류하여 <교회>의 본질을 크게 훼손함으로써 「하늘의 시민권자」들로서의 품격을 잃은지 오래입니다. 그래서 우리 한국 교회가 욥의 고백처럼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 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욥42:5-6)라는 참회의 통절한 전환점(turning point)에 서서 ‘갱신’의 역사를 다시 시작해야 소망이 있지 않겠어요?
J형. 그렇다면 세상의 축소판이 되었다는 한국 교회의 오해와 오류는 과연 무엇이며 찾아야 할 본질은 무엇일까요? 그 첫 번째는, 교회의 본질에 대한 오해를 정리하는 결단입니다. 교회에 다닌다고 하는 많은 사람들, 심지어 신학 교육을 받고 어려운 과정을 거쳐 목사의 직분을 받은 사람들까지도 교회(존재)와 예배당(소유)을 혼동하거나 동일시하는 한심한 세태(世態)입니다. 한 번쯤 교회를 그려보라고 하면 아마 십중팔구 아무 생각 없이 십자가 종탑이 세워진 예배당 건물을 그리지 않을까요? <교회>는 사람인데 건물로 생각하는 오해 말입니다. 성경적 바른 개념이 서 있는 지체라면 <교회>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들의 모임’이며, 그 <교회>는 ‘모이는 교회’로서 예배(Worship)와 교육(Instruction)과 친교(Fellowship), 그리고 ‘흩어지는 교회’로서 복음 전도(Evangelization) 등 네 기능이 작동하는 유기체(有機体, Organism)라고 말할 것입니다. 또한 교회에는 세상적인 것을 초월하는 정신, 즉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본다는 것은 영광을 구하는 신앙 생활을 하고자 함이 아니라, 오히려 낮고 참담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복음의 정신을 담고 있다는 믿음의 공동체가 진정한 <교회>라고 말해야 옳습니다. 그 오해의 두 번째는, 교회를 구제 단체나 구호 단체라고 생각하는 오류입니다. 교회가 가난한 자들과 소외된 이웃들에 대해서 구제와 구호의 일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친히 행하시고 가르치셨지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구제 단체나 구호 단체로 좁게 이해하는 것은 교회 본질에 대한 철저한 오해입니다. 교회의 본질은 구제, 구호의 수준을 무한히 초월한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오해의 세 번째는, <교회>의 구성원되는 지체들끼리만 사랑과 친교를 나누는 공동체라고 생각하는 오류입니다. 주님의 지체들이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일이야말로 너무나 성경적이고 바른 일이지만 그것이 교회의 본질로 생각한다면 너무나 저급한 인식입니다. <교회>의 본질은 친교 단체의 수준보다 무한히 깊으며 세상을 향해 섬김의 도를 다해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생애가 극명하게 보여 주셨습니다. 기독교의 사랑은 <교회> 영역 밖으로 파급되는 우주적인 사랑입니다. 그 오해의 네 번째는, <교회>가 수익 사업을 병행하여 여유로운 자금을 확보해야 많은 일을 감당할 수 있다는 오류입니다. 이러한 오류는 <현대 교회> 안팎에 널리 인식되어 있어요. 이는 <교회>의 본질에 대한 너무나 천박한 오해이며, 세인들에게 교회를 하나의 종교사업체로 인식하도록 빌미를 줄 뿐입니다. 하늘에서 가져 온 신성한 <교회>에 부대 사업이란 어불성설입니다. 철저히 회개하고 본질을 찾아야 할 당면 과제입니다. 끝으로 결정적인 오류는 천민자본주의에 함몰된 그릇된 재물관인데 지면상 따로 떼어서 형과 함께 고민하고 싶습니다. 이들 오해와 오류들이 「하늘의 시민권자」들이 저지른 죄과요, 경건의 능력을 잃어버리게 한 원천입니다.
J형. 그렇다면 과연 하늘에서 세상으로 가져온 <교회>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성경은 <교회>를 복수의 ‘사람들’로 정의하고 있습니다(마18:20, 참조). 그리고 이 ‘사람들’은 단순한 자연인들이 아니라, 예수님을 주와 구주로 고백하고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보혈로 죄사함을 받아 거듭나고 중생한 ‘새 사람들’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새 사람들’이되 그냥 단순하게 모였다고 <교회>가 아니라 동일한 신앙고백 위에서 성령의 운행을 통하여 인격적으로 친밀한 연합적 공동체를 이루었을 때, 비로소 <교회>라고 말할 수 있고, 이것이 <교회>의 본질이지요. 그래서 영국의 웹스터 영어사전은 ‘Church’라는 단어를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들”이라고 뜻 풀이하고 있지 않소? 이와 같이 <교회>의 본질을 이해할 때 <교회>를 세우고 <교회>를 키운다란 건물을 짓는다고 하는 것과는 아무런 본질적 관계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물론 「하늘의 시민권자」들이 함께 <교회>로 모여 예배하고, 교육하며, 사귐을 갖기 위한 공간으로서의 시설을 소유하는 것은 정당한 일입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물리적 건물은 <교회>와 동일시하거나 신성시하여 건물을 구입, 또는 짓고 세우는 것이 곧 <교회>를 짓고 세우는 것이라는 잘못된 인식은 반드시 개혁되어야 할 명제입니다. 왜냐 하면, 여기 「짓고 세움」이란, 영적 공동체, 예배 공동체, 교육 공동체, 유기적 코이노니아 공동체를 「짓고 세운다」는 뜻으로서 하나님의 초청(찾으심. 창50:24-25, 요4:23)에 <교회>가 응답하는 예배 행위와 시민권자들 상호 간의 친밀하고 막힘 없는 교통, 끈끈한 사랑과 배려, 그리고 섬김의 손길이 공동체 울타리를 넘어 광야를 향하여 더 진지하고 깊이 있게 실천하는 공동체가 <교회>의 본질이니까요. 그러하기에 진정한 교회 성장은 물리적인 부동산 확충과 재정 보유, 사역 확대에 우선하여 교회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의 내면적, 영적 성숙에 집중해야 <살아 있는 교회, 살리는 교회>로 존재한다는 것을 기억하고 싶습니다. 그 이유는 개인의 영적 성숙의 목표가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게 함”(엡4:13)에 있기 때문입니다. 유감스럽게도 한국 교회는 그동안 노먼 빈센트 필, 로버트 슐러, 조엘 오스틴의 적극적 사고방식. 맥가브란, 피터 와그너의 교회 성장론. 릭 워렌, 빌 하이벨스의 구도자의 예배. 조용기의 삼박자 오중축복론 등의 거센 탁류에 빠져 버린 <교회>를 구할 사명이 압도하여야 합니다. 이와 같은 상처 앞에 우리 <교회>가 던져야 할 질문은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이지 않습니까? 산상수훈에서 엄히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22-23). 오늘날 한국 교회의 위기는 바로 예수님을 “주여 주여” 입술로 부르기는 하지만, 실제로 「하늘의 시민권자」가 아닌 「영주권자」들이 <교회> 공동체 안에 너무 많이 들어와 있다는 데 문제는 심각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심지어 목회자가 되고 중직자가 돼 있으니 위기는 필연적일 수 밖에요. 종교개혁의 달이라 해서 학술회다, 세미나다 해서 교회사와 신학에 대한 지식을 쌓고 10월 마지막 주일에 한편의 강설을 듣는다고 「영주권자」가 「시민권자」가 되고, 또 「신앙」이 소-옥 자란다고 할 수 있을까요! 「신앙」이 지식을 기반으로 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신앙」과 「지식」을 동일시 하는 것 또한 철저한 오류입니다. 「신앙」이란 지식이나 경험이 아니라 인격이 다른 인격을 신뢰하는 것, 신앙의 대상에게 전적으로 의탁하는 것, 자신을 완전히 맡기는 것이라고 말씀한 형의 논리가 성경적입니다.
J형. 참된 「신앙」은 바른 지식과 함께 시작한다는 형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래요. 참된 「신앙」이란 그래서 맹목적이지 않으니까요. 의심도 질문도 제기하지 못한 채 무조건 믿고 ‘아멘’하는 것이 「신앙」은 아니지요. 아무런 지성적 근거도 없이 막무가내로 주장하고 강요하는 것 또한 「신앙」은 아닙니다. 참된 「신앙」은 반드시 그 「신앙」에 일치하는 지식이 순종으로 이어지고 삶으로 실천할 때 생동합니다. 바로 그 한 사람이 「하늘의 시민권자」입니다.
J형. 주님 앞에 엎드립니다. “예수님을 주님(Kurios)과 구주(Christ)로 고백하오며, 주님 말씀에 더욱 순종하는 삶을 살아갈 수 밖에 없는 「하늘의 시민권자」로 살아가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