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권기독교근대역사기념사업회 콘텐츠위원 김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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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의 현지 임기 시작은 현지 도착한 날부터다. 그리고 교단이나 선교회에서 파송하면서 명령한 현지의 도시에 도착한 날부터다. 한국 선교 초기 미국이나 캐나다 지역에서 온 선교사들은 태평양을 건너 일본을 거쳐 한국에 들어왔다. 그들이 한국에서 맨 처음 도착한 곳은 부산이고 이어서 남해와 서해를 따라 제물포(인천)에 닿은 후 한강을 거슬러 서울에 입성하였다.
유진 벨은 1895년 4월 4일 부산에 도착하였고, 8일 제물포, 그리고 9일에 서울에 도착하였다. 부산포나 제물포도 한국령이긴 하나, 서울에 들어온 9일이 한국 도착일이며, 내한 선교 시작한 날로 기산한다. 벨과 아내 로티는 미남장로교선교부 조선 파송 선교사로는 각각 10번째와 11번째로 들어왔다. 그들이 서울에 입성했을 때는 3년 전에 7명이, 그리고 1년 전에 2명이 먼저 들어와서 이미 활동하고 있었다.
미국 남장로교단은 1892년 가을에 갓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된 3명과 가족 등을 묶어 7명을 조선에 보냈다. 전킨과 레널즈는 갓 결혼한 아내와 함께, 테이트는 미혼으로 역시 미혼인 누이동생이 함께 하였고, 또다른 미혼여성 데이비스였다. 이들이 조선에 선교사로 가게 된 계기는 언더우드 목사가 제공하였다.
1895년 한국 기독교 선교를 맨 처음 시작한 미북장로교의 호레이스 언더우드 목사는 6년후 1891년 안식년을 얻어 미국에 돌아가 순회하며 조선 선교를 홍보하고 기도 요청을 벌였다. 10월 테네시 주 내슈빌에서 열린 미국신학교해외선교연합회에서 조선 선교에 대한 강력한 콜링을 외쳤다. 그 자리에 참석하였던 맥코믹 신학교의 테이트와 리치몬드 유니온 신학교의 레널즈, 전킨, 존슨이 이에 응답하였다. 이들은 즉각 미남장로교단 본부에 자신들을 조선에 선교사로 보내 달라고 요청하였는데 그만 거절당하였다.
당시 미 남장로교 해외선교부는 이미 중국, 브라질, 멕시코, 쿠바, 그리스 등 여러 나라에서 선교사업을 크게 벌이고 있었다. 따라서 현실적으로 추가 사업을 벌이기엔 경제적으로 어려웠고, 더군다나 조선이라는 나라에 대한 정보도 전혀 없었다. 레널즈와 전킨 등은 신학교 기숙사에서 전적으로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레널즈는 교단 선교지에 “우리는 왜 조선으로 가야 하는가?”라는 상당히 당돌하고도 거침없는 칼럼을 기고하며 의지를 불살랐다. 미남장로교 사정을 이해한 언더우드 형제는 2,500불의 거금을 기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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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남장로교 내한 2진으로 와서 레널즈와 함께 목포를 찾아온 첫 선교사였던 드루(유대모)와 아내 루이시 |
7인의 선발대
기도와 기부가 이어져 미남장로교단에서도 조선에 새롭게 선교사업을 벌이기로 하고 이들 7명을 모아 보내게 되었다. 언더우드가 도전한 지 정확히 1년후, 그동안 테이트, 전킨, 레널즈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전킨과 레널즈는 결혼하여 동반자와 함께 조선 선교에 헌신하였다. 아쉬움이 있다면 맨 처음 가장 열의를 보였던 존슨은 개인 사정상 제외되었다.
7명의 선교사가 선발되어 1892년 9월 7일 세인트루이스 센트럴처치에서 파송예배가 드려졌고, 다음날 함께 출발하여 일본을 거쳐 조선에 들어왔다. 다만 리니 데이비스가 일본에서 먼저 출발하여 10월 18일에, 나머지 6명은 11월 3일에 서울 도착하였다. 이들은 7인의 선발대로 불렸다. 이들은 서울에서 집을 매입하여 거주하며 한국어를 익히며 선교 준비하였다.
미남장로교 7인이 서울에 도착할 당시 조선에는 여러 나라 여러 교단에서 온 20여명 이상의 선교사들이 이미 활약하고 있었다. 1884년 알렌을 시작으로 미북장로교는 언더우드, 헤론, 마펫 등이, 1885년 시작한 미북감리교는 아펜젤러, 스크랜턴 등이 있었고, 1889년에는 호주장로교가 1890년에는 성공회와 침례교가 그리고 1892년 미남장로교는 조선에서 선교사역을 시작하게 되었다.
각 나라와 신학 색깔이 서로 다른 선교사들은 조선에서의 아름다운 사역 협력을 위해 1893년 1월 소위 “예양협정”을 맺는다. 선교지 중복을 피하고 서로 다른 지역에서 하자는 상호 존중과 양보의 미덕을 드러낸 것이다.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한다”는 바울의 태도가 한국 선교 초기에는 힘을 발휘하였다. 그래서 북장로교는 서울, 평안도, 경상북도와 청주에, 캐나다 장로교는 함경도에, 호주장로교는 부산과 경남에, 감리교는 서울, 인천과 충청, 강원도에, 그리고 미남장로교는 호남과 제주 지역에서 선교가 나뉘어 이뤄졌다.
호남 일대를 선교지로 배정받은 미 남장로교는 서울에서 어학훈련과 준비를 갖추며 이듬해 1893년부터 서울 이외의 지방을 다니기 시작했고, 1894년에는 드디어 전라도 일대에 대한 첫 본격적인 정탐에 나섰다. 이에는 레널즈와 드루 선교사가 한국인 조사 2명과 함께 4사람이 그해 3월부터 5월까지 두 달 간에 걸쳐 시행하였다. 군산과 전주부터 말을 타고 남하하여 고창, 영광을 거쳐 목포에, 그리고 다시 동으로 해남과 고흥을 거쳐 순천, 여수에 이르는 여행이었다.
드루 선교사는 1진 7인의 선발대가 한국에 온 지 1년 4개월 후인 1894년 3월에 아내와 함께 내한하여 8번째와 9번째 미남장로교 조선 선교사가 되었다. 한국에 들어오자마자 채 적응도 안 된 상태에서 이미 전라도 여행계획을 가지고 있던 레널즈를 따라 동행하며 전라도를 처음 조사하고 돌아보는 영광을 누렸다.
4월 18일 오후 1시에 목포에 도착하니, 목포에 들어온 첫 선교사가 바로 레널즈와 드루다. 의사 선교사로 들어온 드루는 나중에 군산에서 전킨 목사와 함께 군산 선교부를 시작하였고, 군산 예수병원을 설립하여 전라도에서 첫 진료를 한 서양 의사였다. 전킨이 교회와 복음 전도 등으로 군산의 교회를 일으켰지만, 오늘날 군산의 기독교가 일어선 것은 드루 선교사가 누구보다 군산 선교에 열정을 가지고 강력하게 선교 사업을 추진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오늘 우리의 주인공 유진 벨과 로티는 드루 이후 1년 1개월이 지난 1895년 4월 9일 서울에 도착하여 각각 미남장로교 10번째와 11번째 선교사가 되었다. 유진 벨이 들어올 때는 이미 1진 선배들은 내한 4년차가 되어서 그동안의 정탐과 성과에 힘입어 전라북도 전주와 군산에서 본격적인 선교를 펼쳐 내었다. 그들이 다하지 못할 전라남도는 뒤따를 후배에게 맡기려 했는데, 마침내 유진 벨이 서울에 오자 미남장로교 조선선교부는 그를 통해 전라남도 선교를 모색할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