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권기독교근대역사기념사업회 콘텐츠위원 김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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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에 있는 한남대학교는 미남장로교선교회에서 세운 학교다. 우리나라에 와서 선교 사역을 펼친 해외 선교회는 저마다 한국 곳곳에 교회는 물론 병원과 함께 학교를 세워 우리나라의 근대교육을 일궜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를 통해 한국 주요 도시마다 교육기관을 설립하였고, 초중등과정에 이어 사회의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한 고등교육기관도 세웠다. 미북장로교는 서울에 연세대와 평양에서 옮긴 숭실대, 대구의 계명대, 그리고 감리교는 이화여대를 세웠고, 미남장로교는 대전에 한남대학교를 만들었다.
1892년부터 내한하여 조선의 호남지역을 중심으로 선교를 펼친 미남장로교단은 전주, 군산, 목포, 광주, 순천에 각기 남녀초중등학교에 이어 오랜 준비 끝에 고등교육기관으로 한남대학교를 설립하였다. 태평양 건너 조선에까지 와서 선교를 펼치던 그들은 자신들이 미국에서 자라온 교회 모델을 이 땅에 펼침과 동시에 그들의 배움터였던 모교를 기억하며 또한 학교를 세우고 교육 사역을 펼쳤다. 그들이 자부심을 가지고 배우며 졸업했던 미국의 대학들, 우리 호남에 와서 하늘의 은혜를 나눴던 선교사들의 출신 대학을 소개한다.
19세기 중반, 미국은 남북전쟁을 겪으며 지역적 갈등을 심하게 겪었고 급기야 종교 단체도 나뉘어 장로교든 감리교든 침례교든 각기 남북으로 나뉘었다. 그 이전 장로교는 신구파로 나뉘었는데, 이번엔 아예 지역별 분열로 인해 1864년 미남장로교단이, 1870년엔 미북장로교단이 각기 재편되었다. 버지니아, 북캐롤라이나, 캔터키를 중심한 스코티시들의 미 남장로교단은 당시 노예문제에 대해 인종주의적이고 전통적 관습과 제도를 옹호하는 입장이 강했다.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후예들이 대부분인 미남장로교단은 선교와 함께 기독교교육에 힘썼다. 세상과 사회 앞에 책임을 지는 지식을 갖춘 지도자 양성과 일정한 정규교육을 갖춘 자를 지도자로 세우는 전통으로 인해 일반 고등교육과 신학교육은 그들에게 매우 중요한 사역이었다.
19세기 중반 무렵엔 산업사회 물결과 함께 새로운 사조들이 다양하게 등장하며 기존의 미국내 기독교학교들이 세속화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이런 즈음에 미남장로교단의 교회에서는 자신들의 자녀들에게 보다 철저한 기독교 학교교육의 필요를 절감하고 학교를 세웠는데, 햄든시드니 대학, 데이비슨 대학, 남서장로교 대학과 센트럴 대학, 그리고 여자 대학으로 메리볼드윈 대학과 아그네스스캇 대학 등이다.
미 남부의 최고 명문으로 버지니아에 있는 햄든시드니 대학은 미북부 프린스턴 출신의 미남부 장로교인들이 보다 엄격한 기독교 인문지성인을 키우기 위해 세웠다. 미 독립선언이 이뤄지기도 전인 1775년에 설립된 오랜 역사를 지녔는데, 재미있는 것은 학교 명칭은 여자 이름이지만, 정작 학교는 여학생 입학이 설립 때부터 불허하는 남학생들만의 학교라는 사실이다. 선교사들 가운데는 레이널즈와 오웬이 이 학교를 나왔다.
노스캐롤라이나에 있는 데이비슨 대학 역시 규율이 엄격하기로 유명한 학교로 목포에서 사역했던 할리스터 의사, 맥쿠첸 목사, 여수 애양원에서 사역했던 토플 의사가 동문이다. 테네시의 남서장로교(로즈)대학 출신으로는 문서선교에 기여했던 클라크(강운림) 선교사와 목포에서 사역한 니스벳 목사, 타마자 목사 등이 있다.
유진 벨 선교사는 센트럴대학 출신이다. 캔터키 리치몬드에 1874년 세워진 학교로 의과대, 치과대 인문과학대 등 세 개의 단과대학이 있었다. 벨은 21살인 1889년 입학하여 인문대학을 다녔는데, 가정 경제가 넉넉지 못해 학비를 줄이려고 2년 만인 1891년 조기졸업 하였다. 동대학을 졸업한 동문 선교사로는 해리슨(목포양동교회 6대 담임)과 조하파(목포연동교회 설립) 목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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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에 수많은 동문들을 선교사로 파송한 버지니아 유니온 신학교 |
센트럴대학과 루이빌신학교를 마치고
유진 벨은 신학에 또 도전하였다. 학사과정을 마친 그해 1891년엔 모교인 센트럴대학내 임시 운영하던 신학교를 다녔고, 정규 신학교 개교가 늦어지자 벨은 이듬해 1892년 버지니아 리치몬드에 있는 유니온 신학교(뉴욕의 유니온과 다르다)에 들어가 공부한다.
미남장로교회 직영으로 가장 권위 있는 학교였던 유니온 신학교는 자그마치 50여명에 이르는 동문들을 우리 조선의 호남에 파송했다. 전 세계 신학교를 통틀어 특정지역에 이렇게나 많은 일군을 파송한 전례가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유니온 신학교와 우리 호남 교회와의 관계는 특별하다. 전라남북도 곳곳에 설립된 100여년 넘는 교회의 설립자들, 그리고 농어촌 어디에나 우리 믿음의 선조들이 있는 곳에는 어김없이 이들 유니언을 졸업한 목사 선교사들의 흔적이 있다. 목포를 찾아와 수고한 유니언 출신만 해도 레이놀즈와 오웬을 비롯하여 섬 선교 하던 맥컬리(맹현리), 무안 전도하던 머피(민도마), 함평과 나주 선교하던 뉴랜드(남대리), 1919년 순직한 크레인과 해방 후 나빈손으로 유명했던 로빈슨 선교사 등이 있다.
유진 벨은 캔터키에 공식적 신학교가 없을 때여서 1892년 버지니아에까지 유학 와 유니온을 다녔지만, 이듬해 1893년 켄터키에도 정식 신학교가 개설되어 또다시 전학을 하였다. 루이빌에 있는 신학교였다. 그리고 그는 다음해인 1894년 졸업을 하였다. 유진 벨이 졸업할 무렵만 해도 캔터키주에는 댄빌에 북장로교가 운영하는 댄빌신학교가 달리 있었는데, 이 둘은 1901년 연합하여 루이빌신학교로 합쳐졌다. 루이빌신학교의 동문으로는 해리슨 목사가 있고, 합쳐진 학교의 후배들로는 정명과 영흥 등 학교교육을 책임졌던 커밍 목사, 함평과 무안을 순회 전도하던 힐(길변하) 목사, 영암, 강진, 장흥 전도하던 조하파 목사 등이 있다.
한편 유진 벨은 루이빌 신학교에 재학하던 1893년 5월 16일 루이빌 노회로부터 강도사 인허를 받았다. 신학을 졸업하기도 전이었지만, 교회 부흥의 속도에 반해 설교자가 부족하던 시기일군을 세우기위한 일시적 제도였으리라. 유진 벨은 재학 중에 해외 선교에 대한 강한 도전과 함께 마음의 결단을 내렸다. 동년 11월 13일 그의 나이 25세에 미남장로회 한국 선교사로 임명되었다. 목사 안수 전이었고, 신학을 채 마치기도 전이었다. 하나님의 부르심, 조선과 목포를 향한 하나님의 열심은 캔터키 시골 청년 유진 벨을 강력하게 일으켜 세우고 계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