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권기독교근대역사기념사업회 콘텐츠위원 김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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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 벨 선교사는 미국 켄터키주 셀비빌 스코츠스테이션에서 1868년 4월 11일 태어났다. 그의 고향 켄터키는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 복서 무하마드 알리가 태어난 곳이며, KFC와 버번 위스키, 말 경주 켄터키 더비 등으로 유명한 고장이기도 하다. 켄터키 출신으로 목포에 찾아와 사역한 선교사는 유진 벨 외에도 해리슨 목사(1908년 양동교회 6대 담임), 조하퍼 목사(1928년 연동교회 설립)와 조마가렛 정명여학교 교장, 그리고 의사 놀란과 포사이드 등이 있다.
유진 벨의 고향은 전통적으로 미국의 대표적인 시골 농촌이다. 밀과 담배, 옥수수 등의 농업경제가 발달했다. 미국의 중남부 일대는 끝없이 펼쳐지는 광활한 사막과 농장지가 특색인데, 켄터키 역시 사방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엄청난 규모의 옥수수 생산지가 곳곳에 있다. 과다하게 남는 잉여 옥수수를 활용하여 증류주를 만들기 시작했고, 미주리 강을 따라 이어지는 수운 물류를 타고 뉴올리언즈의 버번에서 재즈와 함께 소비되는 버번 위스키 산업의 전초기지가 바로 켄터키다.
세계인의 패스트푸드를 점령한 KFC도 이곳에서 나왔다. 지팡이를 들고 선 인자한 할아버지 마스코트는 이 브랜드를 창시한 샌더스 대령이다. 우리나라에선 햄버거를 주로 하지만 원래는 치킨이 주메뉴였다. 압력솥을 이용하여 기존보다 훨씬 빠른 시간에 치킨 상품을 내어놓는 기술로 맥도날드나 버거킹과 함께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처음 상호는 ‘Kentucky Frid Chicken’이었는데, 재정사정이 안 좋았던 주정부에서 이름 사용료를 내세우자 아예 이름을 이니셜을 따 ‘KFC’로 바꾼 것이다.
켄터키주는 말 사육도 발달하여 종마 경주인 켄터키 더비로도 유명하다. 미남장로교 선교 의사로 왔던 알렉산더는 아버지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얼마 있지 못하고 미국으로 돌아갔지만, 그는 아버지가 물려준 켄터키의 엄청난 규모의 종마 사업장을 경영하며 상당한 기부와 헌신으로 호남 선교 사업에 일조했다. 순천에 그의 이름을 기념한 알렉산더 병원이 있었고, 지금도 안력산문화재단을 통한 그의 유업이 이어지고 있다.
유럽의 이민자들이 아메리카에 들어와 원주민을 몰아내고 독립전쟁을 거치면서 새로운 나라 미국을 만들 당시만 해도 13개주였으며 켄터키는 버지니아에 속한 카운티의 하나였다. 1792년 6월 켄터키 카운티가 버지니아에서 분리되고 주로 승격하여 미국의 15번째 주가 되었다. 켄터키주는 우리나라 남한의 면적과 거의 흡사하다. 미국사회에서는 흔히 남한을 이야기할 때 켄터키주를 예로 든다고 한다. 또 미국인들은 흔히들 농촌, 혹은 시골 촌놈을 이야기할 때는 켄터키를 떠올린다고 한다. 지금이야 수많은 다른 중부지역의 농촌 주들이 많지만 옛 초창기 북동부 지역일대에서만 지내던 시절의 미국에서는 켄터키가 농촌을 대표하는 지역이어서 그런 듯하다. 켄터키주의 수도는 프랭크퍼트인데 인구가 고작 2만에 불과하다. 주도는 아니지만 가장 큰 도시는 루이빌이다.
유진 벨은 루이빌 가까이 있는 셸비빌이라는 곳에서 출생했다. ‘셸비’ 집안사람들이 사는 마을이라는 것 같다. 그 유명한 ‘톰아저씨의 오두막’과 관련 있다. 미국의 흑인 노예문제를 비판하는 소설로 주인공 ‘톰’은 켄터키 셸비 농장의 노예였다. 해리엇 비처 스토가 이 소설을 1852년에 출판했을 때 미국 사회에서는 상당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이미 오래전부터 노예 문제가 미국사회에서 여러 형태로 심각하게 대립과 갈등을 낳았던 터에 링컨 대통령이 노예 해방을 내걸면서 남북 간의 노예 갈등은 결국 내전으로까지 치달았다.
1861년부터 만 4년간 치러진 남북 전쟁에서 처음엔 켄터키는 중립적 태도를 취하였다. 농장이 많아 흑인 노예도 상당히 소유했던 켄터키였기에 노예 해방에 대해 소극적이었지만, 남부연합군의 공격을 받게 되자 켄터키는 북부 편을 들어 전쟁을 치렀다. 정치 군사적으로는 북부에 가까웠지만, 켄터키의 정서나 교회의 사정은 남부쪽과 가까워서 후에 전쟁이 끝나고 장로교가 남북으로 갈릴 때 켄터키주의 교회들은 미남장로교회에 대부분 속하였다.
유진 벨은 미국 내전이 끝난 3년 후인 1868년에 출생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윌리엄 헨리 벨, 어머니는 프랜시스 배너블 스콧이었다. 위로 형 헨리 스콧, 동생들은 애니, 제임스 아치볼드, 아이다, 마샬, 데이비드로 4남 2녀의 6남매 중 차남이었다. 유진 벨의 부모와 형제들은 셀비빌에서 대부분 평생 거주하며 농,목축업에 종사하였던 것 같다. 아버지는 노새와 관련하여 멀리 다른 지역까지 다니며 사업을 했고, 형 스콧은 우유 사업을 벌였다. 부모의 사업은 크게 실패하기도 하여서 대체로 풍족하기보다 재정적 어려움에 곤란을 겪었던 가정으로 보인다. 유진 벨은 학자금 사정이 어려워 대학을 남들보다 속성으로 마치고 졸업하였다. 유진벨 고향의 부모형제 묘는 대부분 셀비빌의 그로브힐 묘지(Grove Hill Cemetery)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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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 벨의 모교회 셀비빌제일장로교회 |
모교회, 셸비빌 제일장로교회
유진 벨과 고향의 친구 가족들의 선조는 대부분 스코틀랜드에서 이민해 왔다. 장로교인들이 대부분이었기에 미국에 이주해서 교회를 세우고 그들의 신앙을 이어갔다. 북아일랜드 등에서 신앙의 자유를 찾아 대서양을 넘어온 자들은 워싱턴 북쪽의 메사추세츠와 필라델피아 등지에 정착한 청교도들이었다. 이와 상대적으로 스코틀랜드에서 넘어온 스코티시 장로교인들은 언약도라 하여 워싱턴 남쪽의 버지니아 등지에 둥지를 틀었다.
켄터키 셸비빌에도 스코티시 장로교들이 모여 1807년 교회를 세웠다. 루이빌 노회에 속한 이 교회에서 유진 벨은 갓난아기 때부터 신앙생활을 하였을 것이고 세례도 받았을 것이다. 어릴 적부터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는 닐(S. M. Neel) 목사가, 그가 대학시절엔 프리슨 목사가 담임하였다. 유진 벨은 청년이 되어 신학을 졸업하고 이 교회가 속한 루이빌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셀비빌제일장로교회(
www.fpcshelbyvilleky.com)의 현재 담임은 핫지(Jay Hodge) 목사이며, 2007년부터 부임하여 섬기고 있다.
200여년의 역사가 흐른 이 교회를 내년이든 언제든 우리 목포교회 목사 장로들과 성도들이 함께 방문하는 날이 있으려나. 그 선배들이 교회의 젊은이를 먼 곳에 보내 우리 목포에 기독교 생명의 역사를 낳게 했으니, 그 은혜의 젖줄을 찾아 우리가 감사드리고 고마움을 표해야 하지 않겠는가. 거기 유진 벨의 후손과 흔적을 찾아보며 감격의 재회(?) 속에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는 귀한 일이 벌어지길 참으로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