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권기독교근대역사기념사업회 콘텐츠위원 김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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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 벨 목사는 목포와 전남의 교회를 시작하고 기독교 하나님나라 종합 사역을 개척한 선교사다. 그가 미국에서 태평양을 건너 조선 호남의 목포 땅에 찾아와 하나님의 생명 복음의 역사를 시작한 지도 이미 120여년이 훌쩍 넘었다. 그를 비롯하여 여러 동료 후배 선교사들이 이 땅을 찾아와 너무도 훌륭하고 거룩한 충성을 벌인 탓에 우리 목포와 전라도 백성들이 생명의 은혜를 덧입고 소망의 세상을 펼쳐나가고 있다. 2022년 현재 목포 교회가 450여 곳이고 수백여 목회자와 천 여명에 이르는 장로, 그리고 십 수만의 성도들이 충성과 복의 삶을 누리고 있다. 오랜 세월 속에 하나님 은혜 크고 그에 상응하는 수많은 선교사들과 일군들의 헌신이 빛나고 아름다운데, 정작 우리는 많은 이야기들을 잘 모르고 잊어가고 있다. 지역 교계가 함께 연합하여 기독교역사관 짓는 운동이 벌어진 것은 참으로 의미 깊다. 이에 맞춰 이 땅에서 벌어졌던 선교사와 일군들의 삶과 충성을 비롯한 하나님의 과거 역사들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해 보인다. 특히 개척자 유진 벨 선교사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 지역 교인이라면 대체로 이름은 잘 알고 있는데, 그러나 정작 그가 무슨 일을 벌였는지 자세히는 모른다. 이번 기회에 함께 유진 벨의 삶과 선교를 돌아보고자 이 지면 연재를 통해 보다 깊이 있게 알고자 한다.
우리나라에 기독교 선교사가 들어와 사역을 한 것은 1884년 알렌, 그리고 1885년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다. 미국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사를 비롯해서 이후에 호주 장로교, 캐나다 장로교, 그리고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는 1892년에 내한하기 시작했다. 여러 해외 선교단체들이 조선에 들어오자 조선주재 선교사들은 회의를 거쳐 서로 협의 하에 지역을 할당하였다. 미국 버지니아나 캐롤라이나, 켄터키에서 온 남장로교 선교사들은 한반도 남쪽 전라도와 제주를 배정받았다.
레이놀즈 목사 부부, 전킨 목사 부부, 테이트 목사와 누이동생, 그리고 리니 데이비스 등 7인의 선발대로 불리는 미남장로교 선교사들이 1892년에 들어와 서울에서 정탐과 준비과정을 가지며 선교지로 배정받은 전라도를 몇 차례 방문하였다. 그중의 하나가 1894년 레이놀즈가 드류와 함께 전라도 여행을 벌인 두 달간의 여정이었다. 제물포에서 배로 군산까지 와서 말을 타고 육로로 군산, 전주를 시작으로 남하하여 전라북도와 전라남도 주요 지역을 순회하였다. 4월 18일 목포에 들르게 되었고 이것이 이 땅에 최초 선교사가 발걸음 하는 날이었다.
이후 보다 구체적으로 사역을 펼치기 시작했다. 1895년부터 전주(테이트)와 군산(전킨)에서 사역이 시작되었고, 점차 전라남도 지역에도 사역 확장을 하기로 하였다. 후배 선교사들이 계속 들어오면서 드디어 유진 벨에게는 전라남도 지역 책임이 주어졌는데, 초기에 나주, 목포, 여수 등지가 선교 센터 후보지였다. 나주는 유생들의 반발이 심했고, 여수는 교통이 불편하던 차에, 목포가 개항이 되어서 이곳을 선교 스테이션으로 확정하고 유진 벨 선교사가 책임 맡아 사역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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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 벨 선교사가 한창 목포에서 활약하던 때의 가족사진, 아내 로티, 아들 헨리와 딸 샬롯. |
■목포 선교부 설치와 책임자 유진 벨
선교사들이 그들의 센터를 목포에 정한 것은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그 일대의 가장 큰 거점 지역이기도 하지만, 특별히 ‘개항’이 이뤄진 것은 우편 연락이나 교통의 편리성이 큰 장점이었기 때문이었다. 1897년 10월 1일 개항이 공식화되자, 미남장로교 조선선교부도 10월 27일 군산에서 열린 6차 선교연례회의에서 목포를 군산과 전주에 이은 세 번째 선교지로 결정하였다. 유진 벨은 11월 하순 목포를 방문하여 부지 조사를 하였고, 겨울 동안에는 다시 서울에서 머물다 이듬해 1898년 봄이 되는 3월 초에 목포를 내려와 본격적으로 사역 준비를 하였고, 두 달간의 준비를 갖춘 후 5월 15일 사람을 모아 공식 예배를 드리며 목포 교회를 시작하였다.
그의 뒤를 이어서 11월에는 의사이며 목사였던 오웬 선교사가 목포에 합류하여 그를 통해서는 의료 진료사역을 펼쳤고, 또 이듬해 1899년에는 목포 최초 여성 선교사 스트래퍼가 내목하여 여성과 어린이 사역을 시작하였다.
유진 벨은 전도와 교회를, 오웬은 치료와 병원을, 스트래퍼는 여성과 주일학교를 협력하여 펼치던 중 안타깝게도 1901년 4월 로티 부인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목포교회를 시작하며 초대 담임목사로서 힘있게 사역을 펼치던 유진 벨에게는 너무도 큰 상처였고, 선교의 동력을 잃어버리는 안타까운 일이었다. 유진 벨은 아내를 서울 양화진에 묻고 자녀들과 함께 미국에 돌아갔다가, 1년 후 다시 힘을 내어 목포에 돌아왔다.
1903년에는 목포 영흥학교와 정명학교를 설립하여 목포에서의 기독교 교육 사역도 본격적으로 펼치기 시작했다. 아울러 그리스도인 된 조선인 일군들을 세워 멀리 전도자로 파송하며 일을 맡겼는데, 영산강을 따라 북상하여 나주와 송정, 영광과 장성 지역에 교회가 세워지기 시작했다.
유진 벨은 1904년 마가렛(군산 사역하던 불의 누나)과 재혼하였고, 그해 겨울 새롭게 광주 선교부가 개설되면서 이들 부부와 오웬 부부가 광주로 사역지를 옮겼다. 목포와 광주에 후배 의사 선교사들이 들어오면서 본격적으로 전도에 더 열심 내던 오웬은 전라남도 동남쪽 일대를 다니며 순회전도와 교회 개척에 열심 내었고, 유진 벨은 광주 교회와 영광 장성 고창 등 서북쪽을 담당하였다.
전라남도에서 선교사역 펼친 지 10여년 지나면서 십 수명의 동역 선교사들이 합류하였고, 광주와 목포뿐만 아니라 순천 여수 등지의 사역도 보다 활성화되고 커지면서 유진 벨은 현장 사역보다는 지역의 책임자로서 행정과 관리 분야에 힘썼다. 1914년 유진 벨은 조선예수교장로회 3대 총회장에 선임되었으며, 평양신학교에서 교수 활동도 하였다. 인생 후반기 광주를 중심으로 일하던 유진 벨은 1919년 사고로 두 번째 아내를 또 잃기도 하였으며, 1921년 세 번째로 쥴리아 여성을 아내로 맞았다. 유진 벨은 1925년 57세로 광주에서 사망하였다. 양림동 호남신학대학교 선교묘원에는 목포 전남 교회의 두 일군 유진 벨과 오웬의 묘가 앞뒤로 자리하고 있다.